yuna's lifelog


2023-03-12 07:06

2023-03-12 13:45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불안, 혼란, 두려움 같은 것이 뒤섞여 커다란 돌덩이처럼 마음을 누른다.
어제 쉬지 않고 집안일을 했지만 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고(대부분 다음주에 먹을 음식 준비), 고양이들은 계속 놀아 달라고 앵앵거리고, 감기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머리는 멍하다. 지난 주는 이 멍한 머리로 끝없이 문서를 읽고 회의에 들어가고 문서를 작성했다. 자동 저장이나 공동 편집이 안되는 환경인 데다 오피스 오류로 작업하던 걸 몇번이나 날렸고, 비슷비슷한 수많은 버전의 문서 내용을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붙이다가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이렇게 머리가 멍한 게 난소를 제거한 탓일까? 계속 이런 상태라면 당장 다음주의 일은 어떻게 헤쳐나갈까? 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여성호르몬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9년 전 호르몬 치료를 받을 때처럼 그 암흑 속으로 다시 끌려들어가는 걸까? 단 몇 초 만에 생각은 끝도 없이 가지를 뻗는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오래되고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오랜만에 등장한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까? 다 끝내버리고 싶어. 도망가고 싶어.’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그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한 평생을 끌고온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느낌과 생각을 요 며칠 사이 거의 다 보았다. 예전의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모르고 살았다. 이런 감정에 한번 빠지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이었다. 누군가, 뭔가 이 비참한 삶에서 나를 구원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 의존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실망하고 또 절망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망가졌고, 죽는 것 외에는 이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도 일을 하고 매일 운동을 하고 제대로 살려고 노력해왔다는 게, 그 인내심이 지금 생각하면 놀랍다.

오늘 아침 그렇게 머리 속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바라보다가 실상사 단톡방에 올라온 정웅기님의 글을 읽고 링크를 따라가 사념처 수행에 관한 경전을 들었다. 붓다는 자신의 말도, 그 누구가 진리(법)라고 가르쳐주는 말도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라고, 스스로의 삶에 적용하고 맞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자신과 법을 귀의처로 삼고(자등명 법등명)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했다. 몸을, 느낌을, 마음을, 법을(사념처)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을 챙기는 자가 되어 머무르라’고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내 몸의 느낌과 거기서 올라오는 생각들과 지난 몇 년간 불교 공부와 수행을 해오면서 조금씩 알게 된 사실들을 조용히 떠올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잘못된 일도 잘못될 일도 없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매순간 완전하게 즐기며 살 것이다.
두렵던 생각들이 조금씩 멀어지고 평온해진다.

인간이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어 모든 고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했다면 아마 붓다가 자등명 법등명이니 얘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사념처 수행 같은 것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고, 알고 있는 것도 매 순간 잊어버리고, 어느 순간 몸의 상태가 생각을 지배하기도 한다. 오늘 같은 날이 또 올 것이다.
그때는 좀더 빨리 정신차릴 수 있기를.

붓다에게 감사한다.
실상사에도 감사하고.
#붓다로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