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2026-08-31 07:36 마지막 출근

2026-08-31 11:20 동료들과 점심

2026-08-31 17:13 막퇴 기념 타코

안녕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그 자리에 있어줘서.

비가 와서 좋다.

2026-08-31 20:19 어렸을 때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오징어게임 같은 걸 하며 놀았다. 흙바닥을 뒹굴며 옷을 찢어먹고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집에 가야할 시간이었다. 이 모든 신나는 놀이를 두고, 피를 나누기라도 한 듯 정다운 동무들과 헤어져서, 집에 가야 하다니. 검푸르게 어둠이 깔리는 운동장은 종말을 맞은 세상의 풍경처럼 서늘하고 아쉬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놀고 싶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조금 전의 아쉬움을 잊고 저녁밥과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뛰어갔고,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잤다. 그러면 그 다음 아침이 왔다. 그날은 그날의 놀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어제 하던 오징어게임이든 뭐든, 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이든 누구든 상관 없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20년이 넘게 프리랜서로 일하며 한 해에 평균 두세 개의 프로젝트를 해왔으니 아마 지금까지 수십 번의 끝을 겪었을 것이다. 처음 만나는 '동무들' - 인터뷰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용자 혹은 고객, 동료, 현업 담당자와 의사결정자들 - 그들과 나눈 질문과 고민과 논의와 결정들, 그리고 수많은 낮과 밤을 꼼짝 않고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보낸 사무실의 책상과, 여러 종류의 냄새가 나던 탕비실과 비슷하지만 모두 다른 화장실, 출퇴근길과 산책길의 풀과 나무들, 새들, 매일 점심에 들러 커피를 사던 카페. 이런 것들을 하루아침에 뒤로 하고 떠난다.

너무 지겨워서 뒤도 안돌아보고 나온 적도 있었고, 다음에 또 볼 약속을 하고 손을 흔들고 나온 적도, 여럿이 같이 웃으며 운동장을 나온 적도, 작별 인사를 하기 싫어 늦은 시간 아무도 모르게 나온 적도 있었다. 조금 더 있고 싶었거나 정든 동무들과 조금 더 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서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전생의 일처럼 잊어버렸다.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또 새로운 동무들을 만나고, 처음 보는 세계의 말과 규칙을 익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몰두해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다가, 어느새 어둑해진 운동장 가에 서서 또 인사를 나눈다.

프리랜서로 서비스 앞단의 전략과 설계를 담당하는 내 일의 특성상 대부분의 끝은 나 혼자의 일이었다. 다들 놀고 있는 운동장을 뒤로 하고 나 혼자 집에 가야하는 느낌이랄까. 20년을 넘게 했으면 무덤덤해질 법도 한데, 그 느낌은 항상 생경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일은 나와 전혀 상관 없는 것이 되고, 몇개월을 가족 보다 더 많은 시간 함께 보낸 이들을 다시는 볼 일이 없어진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하나의 자아에서 다른 자아로 넘어가는 것 같은 비연속적이고 비현실적인 경험.

금강경의 한 구절 '여몽환포영'을 떠올린다.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 번개 같으니.'

삶은 너무나 짧고도 기이할 만큼 생생한 하나의 꿈처럼, 하나의 세계를 내어주어 한동안 흠뻑 빠져 놀게 하고,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질 무렵 거두어가고, 그 끝의 서늘함을 다 느끼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를 내민다.
꿈인 줄, 환상인 줄 몰라서 울고 웃는 것이 아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안에서 기꺼이 흙바닥을 뒹굴고 옷을 찢어먹으며 온 힘을 다해 울고 웃는다.

즐거웠어요.
고마웠어요.
안녕. 동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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