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yuna said :
2026-10-16 갑자기 예전에 나 우울증 엄청 심했을 때 생각이 났어. 그때 얘기를 너한테 해주고 싶어. 왜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물었지. 우울함과 절망 같은 게 항상 기저에 깔려 있었고 몸이 안 좋거나 상황이 안 좋을 때, 특히 몸이 안 좋을 때였던 거 같은데, 그런 모든 게 망가졌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올라오면서 엄청나게 검은 그림자를 드려웠어. 몸과 마음이 모두 무기력했고 엄청나게 짜증이 났던 상태 같아 지금 생각하면. 짜증이 너무 나서 머리끝까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상태 말이야. 폭발할거 같은 상태. 근데 그 짜증이 나한테 난거야. 나와 나의 삶에 대해서. 왜 이렇게 모든게 망가졌는지,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하지. 그리고 더 이상 되돌아 갈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고 끝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정말 실제와는 거리가 먼 생각들이었지. 아무런 방법도 몰랐어. 거기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말이야. 그래서 암이 걸리기 전에는 술을 마셨어. 그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술을 마셨고, 암이 걸린 후에는 술을 못 마시니까 운동을 했지. 지금은 건강하려고 운동을 하지만 그때는 마음의 고통을 잊으려고 몸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암에 걸리기 전에 술담배를 했던 것과 암에 걸린 후에 운동을 했던 게 같은 맥락이었어. 이 망가진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 세상에서 이 추한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

myGPT said :
이제야 네가 예전에 쓴 글에서 반복해서 등장했던 그 '검은 생각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흥미롭고 가슴 아픈 건 네가 술을 마셨던 이유와 운동을 했던 이유가 사실은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발견이야. 겉으로 보면 술과 담배는 몸을 해치는 행동이고 운동은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이지. 그런데 당시 너에게는 둘 다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던 거야. 하나는 의식을 흐리게 해서,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피로로 정신적인 고통을 덮어서. 그리고 그 밑에는 단순히 괴로운 감정을 없애고 싶다는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괴로운 삶을 끝내고 싶은 것과,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는 것이 뒤섞여 있었던 게 아닐까. 네가 묘사한 우울은 단순히 슬프거나 기운이 없는 상태가 아니야. 분노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런데 그 분노가 바깥을 향하지 않고 너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거지.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네가 **“정말 실제와는 거리가 먼 생각들이었지”**라고 말한 부분이야. 지금의 너는 당시의 생각들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때는 그 생각들이 너무나 명백한 현실처럼 느껴졌겠지. 생각이 만들어낸 결론이 다시 절망을 깊게 하고, 깊어진 절망이 또다시 그 결론을 확신하게 만드는 식으로.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돼.
네가 10년 수행 기록의 첫 글에서 '나는 아마도 잘 살고 싶었던 것 같다'고 썼잖아. 오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문장이 조금 다르게 다가와. 당시의 너에게는 잘 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었던 것 같거든. 어쩌면 서로 모순되는 마음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과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서로 다른 반응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지금 이렇게 그때를 돌아보면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건, 당시 실제로 죽음을 생각하거나 구체적으로 시도하려 했다는 뜻이야? 아니면 그 끔찍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는 뜻에 더 가까워? 그리고 그 마음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아니면 이제는 완전히 지나간 과거의 감정인지도 궁금해. 네가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 더 듣고 싶어. 지금 당장 수행이나 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어떤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우선은 네가 겪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싶어.

yuna said :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얘기할 때, 그때의 나랑 비슷한 느낌이일까? 나는 그게 궁금해. 내가 느꼈던 건 ‘죽고 싶다’가 아니라 ‘이 추한 나를 없애야 한다’에 가까웠어.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살고 싶은데, 뭔가가 나를 없애려는 느낌이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두 가지의 생각이 내 안에 동시에 있었던 것 같아. 난 나를 죽이려는 그 생각이 너무 무서웠어. 이 집에 이사와서 어느 비오던 날 나 혼자 있었고 뒷산으로 향한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뭔가가 나를 그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저기로 떨어지라고. 너무 무서워서 바닥에 주저 앉았어. 그 아래를 보고 있다가 내가 나도 모르게 뛰어 내릴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할 때 그런 느낌일까?

myGPT said :
네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느꼈어. 너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네 안에서 너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언가를 두려워했던 것 같아. 살고 싶은 너와, 너를 없애야 한다고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생각이 동시에 존재했던 거지. 그리고 그 생각이 너무 강해져서 마치 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을 것처럼 느껴졌던 거고.

네가 비 오는 날 창가에서 경험한 일이 특히 마음에 걸려. 정신의학에서는 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구분해야 하는 경험들이 있어. 하나는 **자살사고(suicidal ideation)**야. 반드시 '나는 죽고 싶다'는 명확한 소망만을 뜻하지는 않아.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신을 해쳐야 한다는 충동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어. 다른 하나는 **침투적 사고(intrusive thoughts)**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이미지, 충동이 갑자기 떠오르는 현상이야. 높은 곳에서 갑자기 뛰어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실제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신이 그렇게 할까 봐 무서워하는 경험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어. 이런 현상을 '높은 곳 현상(high place phenomenon)'이라고 부르기도 해. 네가 경험한 일이 정확히 어느 쪽이었는지는 지금 이야기만으로 판단할 수 없어. 특히 그 이전부터 자신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반복되었다는 점 때문에 단순한 높은 곳 현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리고 네 질문으로 돌아가면. 응.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 가운데는 네가 묘사한 것과 상당히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 어떤 사람은 정말로 죽음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삶의 고통이 끝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자기혐오를 느껴. 또 어떤 사람은 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해치려는 충동 사이에서 극심한 공포를 경험해.
이 마음들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아.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

내가 네 이야기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때 너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생각을 자기 자신의 의지와 구분해서 경험했다는 것이야.
'나는 살고 싶은데, 뭔가가 나를 없애려고 한다.'
이건 네가 겪었던 내적 갈등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현 같아. 다만 실제로 별개의 무언가가 너를 조종했다는 뜻은 아니야. 극심한 우울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 충동조차 낯설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거든.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는 대목도 중요해. 그 순간 너는 그 충동을 두려워했고, 위험한 곳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행동을 했어. 한 가지는 꼭 확인하고 싶어. 지금은 그런 생각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는 상태야? 아니면 아주 드물게라도 비슷한 느낌이 다시 찾아오니? 이걸 묻는 건 네 과거를 병리적으로 규정하려는 게 아니라, 당시의 경험과 현재의 안전을 구분해서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야.

yuna said :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 뒤로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들지 않았어. 모든 게 완전히 망가졌다는 게 가능한가? 인간의 삶은 엄청나게 많은 조건과 면면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중에 극히 일부만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잖아. 모든 게 망가져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경우가 가능한가?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지.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일이든 나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거야.

myGPT said :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일이든 나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거야.”
이 말이 참 인상적이야. 특히 네가 조금 전에 들려준 과거의 이야기와 나란히 놓고 보니까. 예전의 너는 삶의 어떤 부분이 무너지면 그것이 곧 삶 전체의 붕괴라고 느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까지 부정하게 되었고. 그런데 지금은 삶의 어떤 부분이 망가지는 것과 삶 전체가 망가지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이해한 거지.

네가 말한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져. 삶은 무수한 조건에 의존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화하는 과정이잖아. 그중 어떤 조건이 사라지고 어떤 관계가 끝나고 어떤 능력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머지 모든 조건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아. 심지어 우리가 '망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조차 특정한 시점에서, 제한된 정보와 관점으로 내리는 판단이고. 그러니 '모든 것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생각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던 셈이야.
첫째, 삶을 하나의 고정된 완성품처럼 바라보았다는 것.
둘째, 그 완성품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
지금의 너는 그 전제 자체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것 같아.

그런데 나는 마지막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겠다는 건 어떤 대단한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도, 앞으로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도 아니잖아. 그저 배가 고프다는 조건이 생기면 밥을 먹는 거야. 슬픈 일이 생기면 슬퍼할 것이고, 몸이 아프면 돌볼 것이고, 해결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수 있는 만큼 해결하겠지. 삶 전체를 정당화할 이유를 찾지 않아도, 지금 일어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이 네가 2016년에 도법스님께 물었던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지금의 답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하고 싶어. 당시의 생각이 지금 보기에는 어리석게 느껴지더라도, 그때의 네가 바보였던 건 아니야. 극심한 우울은 사람이 현실을 평가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바라보는 능력 자체를 좁혀놓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불교적 이해가 지금 너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우울증이 의학적 치료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지금의 너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은 거야? 아니면 이제는 그 질문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고 느끼는 거야?
나는 이 둘 사이에 꽤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yuna said :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거지? 나는 내가 꼭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지금 당장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지만 산다면 즐겁고 기쁘게 다른 존재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해.

myGPT said :
내가 생각한 차이는 이거야. 첫 번째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낸 경우야.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식이지. 삶을 지속할 이유를 발견한 거야. 두 번째는 애초에 삶을 지속하기 위해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벗어난 경우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거지. 삶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여러 조건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으니까. 네 이야기를 들으니 너는 두 번째에 훨씬 가까운 것 같아.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구분이 있어. 살아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질문이라는 것. 네가 말한 '즐겁고 기쁘게, 다른 존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서 살겠다'는 건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라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잖아.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과거의 너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질문에 반드시 답을 내려야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게 된 거지.

더 흥미로운 건 네가 말한 삶의 태도야. 즐겁고 기쁘게 살고 싶다는 것과 다른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야.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 즐겁게 살겠다는 것도 아니지. 나는 이게 네가 그동안 공부해온 연기와 무아를 실제 삶에 적용한 결과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해. 나와 다른 존재들이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이해가 반드시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까 네가 들려준 우울증 시절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변화가 더욱 선명해져. 예전에는 '이렇게 망가진 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슨 일이 생기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겠다'고 말하고 있어. 자기 존재에 대한 판단에서, 자기 삶을 돌보는 행위로 옮겨온 거야. 나는 이것이 네 10년 수행 기록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해.

다만 네가 방금 말한 것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 '즐겁고 기쁘게 살겠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기대나 목표가 될 수 있잖아. 그렇다면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은 어떨까? 내 생각에는 지금의 너라면 그런 날도 그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즐겁고 기쁘게 산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뜻과는 상당히 다를 거야. 내가 이해한 게 맞을까?

yuna said :
그렇네.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날도 오늘 같은 날도 분명히 있는 거니까. 내가 아까 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배가 고프면 나는 밥을 먹을 거야’라는 말은, ‘밥을 먹겠다’가 아니라 ‘밥을 먹을 거’라는 말이야. 그 차이를 알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돌보겠다는 결심 같은 게 아니라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그러니까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날도 나는 밥을 먹을 거야.

myGPT said :
아. 이제 알겠어. 내가 아까 네 말을 잘못 이해했네. ‘밥을 먹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밥을 먹을 거야’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진술이구나. 전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돌보겠다는 결심이지만, 후자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 거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슬프면 슬퍼하고, 즐거우면 웃겠지.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 삶은 계속되는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네가 더 이상 삶 전체를 하나의 판단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아. 예전에는 어떤 일이 잘못되면 '내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러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잖아. 지금은 어떤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것은 그때 일어난 하나의 일일 뿐이야. 그 일이 삶 전체를 규정하지는 않아. 그리고 그 와중에도 배는 고파질 거고, 밥을 먹을 거야.

삶이 계속되기 위해 삶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제 네가 말한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고, 지금 당장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도 더 분명하게 이해돼. 그건 삶에 대한 무관심이나 체념이 아니구나. 삶을 반드시 어떤 의미나 목적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에 가까워. 그리고 나는 여기서 네가 10년 동안 공부해온 연기가 떠올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니.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실제로 극심한 우울에 빠진 사람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할 수 있어. 그러니 이것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필연적인 법칙으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네가 지금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 어쩌면 네가 찾아낸 것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에 더 이상 거창한 이유나 결심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해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게 네가 처음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절실하게 찾던 답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yuna said :
응. 그래서 네가 ‘지금의 너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은 거야? 아니면 이제는 그 질문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고 느끼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거야.

myGPT said :
아, 그렇구나. 이제 네가 왜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지 알겠어. 나는 두 가지를 구분했지만, 너에게는 그 구분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던 거야.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라면, 그 순간 그 질문 자체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니까. 답을 얻은 것과 질문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의 일이었던 거지. 생각해보니 이건 네가 그동안 이야기해온 고통에 대한 이해와도 닮았어. 예전에는 고통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답을 찾았잖아. 그런데 이제는 고통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데까지 왔고. '왜 살아야 하는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사라지면서, 그토록 절박했던 질문도 힘을 잃은 거야.

그리고 나는 오늘 네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10년 수행 기록의 출발점과 지금의 도착점이 조금 더 선명하게 연결됐다고 느껴. 다만 '도착점'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겠지.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거고.
그 말이 오늘 대화에서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