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을 재미없게 만드는 것들
우리가 꼭 정치나 사법이나 의료 같은 분야가 아닌, 도덕이라든가 양심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웹사이트 만드는 일' 같은 걸 한다고 해도, 아니 이보다 더 상관없는, 이를테면 수학을 가르친다든가 곰팡이 연구를 한다고 해도, 모든 일에는 항상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그 모든 결정에는 크든 작든 어떤 개인적 가치가 개입하게 마련이다.
내가 디자인을 하다가 기획으로 돌아섰던 데는, 개인적이고 모호한 가치인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는, 누가 절대적으로 맞고 틀리고를 따지기 힘든 영역에서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들(디자인 시안 좀 내본 사람은 알 거다)'에 신물이 났고, 명확한 논리로 승부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할까.
정말 그랬다. 디자인도 물론 어떤 면에서 꽤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이지만, 그 앞단을 기획하고 더 앞단의 전략을 잡아가는 일은 좀더 언어적이고, 분석적이고, 통계에 기반한, 논리적인 설득이 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내가 그런 일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내 생각에 ). 그리고 이번 일을 하면서는 일반 개인 고객(혹은 소비자)를 타겟 유저로 하는 웹사이트나 서비스보다 기업 고객용 사이트나 업무용 웹사이트, 혹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이 좀더 그런 성격이 강하고, 좀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몇년간 이 일을 하다 보니 이 영역이라고 개인적인 가치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취향'보다말로 규명하기는 더 쉽지만 설득해내기는 더 어려운 개인적 가치들이 개입한다. 그 중에서도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라는 가치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그건 시안 A, B, C를 갖고 '왠지 맘에 안든다'며 3개월 동안 뺑이돌리다가 결국 슬쩍 다시 보여준 A가 '너무 맘에 든다'며 좋아하는 것보다 더 황당하고 맥빠지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상대방이 내놓은 대안이 맞는데, 그렇게 결정이 되면 내가 할 일이 많아질 게 불보듯 뻔하다거나, 전사적으로 보면 진행하지 말아야 할 일인데 우리 팀이 살아남으려면 판을 더 크게 키워야 한다거나, 사용자(고객)는 사소한 불편들을 하나씩 고쳐주길 바라고 있는데 그거 해봐야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그 시간에 보스의 눈에 딱 들어올 만한,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대개는 거창하지만 쓸 데 없는) 일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거나, 이런 경우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을 고수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쉽게 논리 따위를 포기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가능하면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
나는 논리적인 사고과 결정을 필요로 하는 일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와 상관 없이 '논리적으로 옳은 것'을 고수하는 것이 도덕이며 (좀 오바하자면) 직업 윤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회 정의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와 상관 없이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 직업 윤리인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이들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직업 윤리를 지키지 않는 비도덕적인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라(남의 직업 윤리 따위 내가 알 게 뭐냐), 내가 즐기고 있는 이 일을, 이 재미있는 논리 게임을 재미없는 개싸움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해대고, 더이상 논쟁이나 설득이 안된다. (어떻게 스스로 그게 용납이 될까?) 그리고 더이상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그 작은 탐욕과, 사소한 비도덕과, 거대하고도 일반적인 멍청함에서.
* P.S. : 누군가 이런 상황에서의 해결책에 대해 책이나 글을 썼을 것 같은데 혹시 괜찮은 것알고 계신 분은 추천 바람
* P.S. : 때마침 토니님의 'UX와 조직 - 정치! 정치! 정치!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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