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얼마 전 우연히 이 글을 읽었다. 요지는 '기획자도 ERD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데이터 흐름에 대해 잘 알고 개발자와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던가.

우리나라에서는 '기획자'라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난 그게 좋다. 기획자가 정보를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사이트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흐름과 그에 따르는 데이터의 흐름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데이터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개별 화면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이트 혹은 서비스를 기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또, 사이트 구축 방법과 도구가 변화함에 따라 앞으로는 파워포인트 등으로 화면(wireframe)을 일일이 그려내는 일, 즉 우리가 통칭 '화면 기획'이라고 일컫는 단계가 점점 없어질 것이고 이런 일을 주로 하는 기획자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댓글들에도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 요즘 참여중인 프로젝트의 길고 긴 brainstorming 과정을 거치면서, 위에서 말한 것들을 하기 이전에 '서비스 기획'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할까 생각해봤다. 어쩌면 이건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혹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서비스 기획의 실제 업무 프로세스나 문서 작성법 아니고 아주 개념적인 얘기들이니까 wireframe이나 ERD 그리는 방법 이런 거 찾아오신 분들은 그만 읽으셔도 됨)

1. 아이디어를 내기

조금이라도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를 만들려고 할 때, 일단 큰 방향이 정해졌다면 하위 줄기들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brainstorming 과정을 거치게 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책과 글에서 다양한 방법론을 말하고 있겠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원래 뭐가 좋아서 뭘 하려고 했었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제약 사항을 확실히 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창의력'이란 말의 함정에 빠져서(창의력이란 것을 맨땅에 헤딩하면서 뜬금없는 멋진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으로 착각하며) 시간 낭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제약 사항에서 오히려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 뭐 다 아는 얘긴가?

2. 정확한 말로 정의하기

이건 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Brainstorming에선 참 많은 아이디어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처음엔 거칠더라도 다듬어서 가능한 한 짧고 정확한 말로 정의한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말이 안되면 구체적인 예를 몇개 들어보면서 서로 정리해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화이트보드나 포스트잇에 쓴다(대충 선 몇개 긋거나 앞글자만 끼적거리지 말고 나중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제대로 쓰기). 최종적으로 글이 아닌 도면이나 그림으로 표현될 개념이라고 해도 일단은 말이 먼저다. 말이 곧 생각이어서, 말 없이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생각하고 구조화하기 어렵다. 우리 뇌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다(내 뇌만 그렇게 생겨먹었고 천재들은 가능할지도 모름). 말로 표현하는 동시에 머리 속에서 그 생각이 제 위치를 찾아간다고 할까. 게다가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 남을 이해시켜야 하니까.

3. 구조화하기

이건 아주 중요하다. 말을 해놓았으면 그 다음에는

  1. 비슷한 수준이나 개념의 것들을 묶어 더 높은 수준의 줄기로 묶고
  2. 그것들간의 관계를 정의하고
  3.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구성요소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구조, 혹은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걸 해놓으면 각 요소들이 전체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정리되고, 어떤 것이 우선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아닌 것을 버리면 된다. 좀 많이 버려야 된다.

그리고 이걸 제대로 하려면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거나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저울질하는 구조적인 사고 능력이 꼭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고 그게 목표인지 방법인지 제약사항인지조차 구분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계속 아이디어만 내봐야 소용 없다. 구조적으로 정리되고 그 안에서 경중이 판단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하지만 돈지랄을 하고 싶다면돈이 아주 많아서 맘대로 하고 싶다면 뭐 어떻겠나. 니 맘대로 하세요. 카하하)

4. 구조를 넘나들며 살 붙이기

목차든 맵이든 일단 구조를 만들었으면 그 후에는 그 구조에 다시 자잘한 생각들을 붙여간다. 어떤 한 부분만 떼어서 고민하지 말고 아까 만든 지도를 계속 곁눈질하며, 매크로와 마이크로, 수평과 수직을 넘나들며 생각한다.
(내가 어디가나 항상 화이트보드와 포스트잇을 찾는 이유가 이거다. 근데 어쩜, 천재들은 이것도 머리 속에 이미 다 들어있어서 화이트보드, 포스트잇 따위 필요 없겠지.)

대충 이런 정도. 2번과 3번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그리고 제일 재밌다).
ERD를 그려야 하냐고?
글쎄, 누가 그리래서 그리는 게 아니라 이걸 말단까지 계속 정교화하다 보면 저절로 그려진다. 그게 사이트맵이건 ERD건 뭐건, 내 생각이 구조화되어 들어갔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이렇게 했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그랬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나). 기획만 잘한다고 서비스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가슴아픈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건 그냥 '필요조건'이라고만 해두자.

흠.

그러고 보니 '성공을 하겠어!'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치, 혹은 진리라고 해도 좋을 크고 작은 사실들을 깨우쳐가기 위해서.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 돈을 벌어야 하기도 하지만, 어떤 큰 이치에서 부서져 나온 것 같은 자잘한 이치를 깨달아 가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고, 그 문제를 풀어내고,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아하, 이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우치게 되는 것.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풀어가는 재미.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이 좋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문제를 풀 때 내가 쓰는 방법이고.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내가 깨달을 수 있는 이치의 크기도 커지고 좀더 근원적인 무언가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 추가 : 일할 때는... 풀기 어려운 문제는 있어도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감정의 문제도 이렇게 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로는 진작에 명확한 해답을 내려놓고도 가슴은 그걸 부인하니(기획을 해놓고 개발을 못하는 상황과 비슷한가? 훗). 똑같은 문제에 계속 부딪혀도 또 걸려넘어지고 또 걸려넘어진다. 어리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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