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싸움

일.work 2009. 10. 25. 19:13

에이전시에 속해서, 그리고 프리랜서로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회사 저회사를 들락거리며 일했다. 어떤 사람과 어떤 주제를 놓고 두세시간 회의를 하다 보면 그사람의 사고 구조와 능력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는데, 회사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디자이너로 일할 때와는 달리 지금 하는 일은 회사의 내부 사정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하는 일이라, 한 회사에서 두세달 일을 하다 보면 그 회사의 문제점, 소위 '이 회사는 이래서 안되는구나'하는 것들을, 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문제가 없는 회사는 없다. 그랬으면 다들 성공했게. 하지만 '이 회사는 이래서 성공했구나'는 단시간에 알 수 없다. 일이 끝나고 2-3년 후에 '아, 그래서 이렇게 될 수 있었을지도...'라고 생각한 경우가 몇 번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실패는 단 하나의 원인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성공이란 아주 많은 원인들이 갖추어졌을 때 어쩌면, 가능한 것이니까.

얘기가 다른 데로 샜다. 하여간 이 회사의 문제란 것이 여러가지일 수 있는데 그중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제일 재밌는 것이 사람 문제다. 더 재밌는 건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고, 더더더 재밌는 건 사람과 사람(조직과 조직)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 즉 싸움이 났을 때다. 이때 누가 어떻게 싸우고, 어떤 식으로 판정이 내려지고, 그 모든 과정에서 양편이, 그리고 회사 전체가 무엇을 얻어내는지를 지켜보면 그 회사의 앞날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회사에서 수많은 논쟁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약하고, 감정적이고, 근시안적이라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회사의 결정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대기업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디 회사만 그렇겠나. 살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절반 이상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주장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설득당하고, 안되면 타협하거나 조정하는 과정일텐데.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도, 제대로 조정하거나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 과정에서 뭔가 깨닫는 것도 얻어내는 것도 없는 시시하고 지리멸렬한 싸움이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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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때 우리 반에 덩치가 산만하고 다혈질인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애 아빠는 군인이었고, 동네 '군인 아파트'에 살았다. 어느날 (지금은 생각도 안나는 이유로) 그애랑 잘잘못을 따지며 싸우게 되었는데, 그애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쌍욕을 하고 나는 조목조목 그애 잘못을 따졌다. 논리로만 보자면 누가 봐도 그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섰다. 그애에겐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았고, 논리 따위는 더더욱 중요하지 않았으며, 내가 이기든 그애가 이기든, 싸움이 끝나고 백만년이 지나도 그애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런 년들이랑 다시는 싸우지 말자' 생각했다. 싸움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와의 싸움. 져도 왜 졌는지 모르고 이겨도 왜 이겼는지 모르며, 심한 경우는 자기가 졌는지 이겼는지도 모르고, 나중에 똑같은 문제로 또 싸운다. 게다가 이런 상대는 대부분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자기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이런 싸움은 시간 낭비다.

게다가 나는 증오나 적대감의 원초적인 배설, 즉 욕이나 폭력, 무례함 같은 것들에 거의 트라우마 수준의 상처를 입는 편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감정적이고 원초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대부분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어떤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데, 재밌는 것은 사람들이 아주 큰 것보다는 오히려 얼마 안되는 돈이나 이해 관계에 더 원초적으로 반응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 왠만하면 돈을 포기한다. 이기든 지든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 그리고 싸울 준비가 안돼있는 사람들과도 싸우지 않는다. 너무 쉽게 이기면 시시하니까.

나는 싸움을 잘 하지 않지만,
상대가 싸움의 룰을 알고 있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반반 정도 될 때,
싸워서라도 꼭 얻거나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그리고 싸움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싸운다.

필요하면 철저히 준비도 하고,
용감하게 맞서기도 하고,
비열하게 뒤통수도 치지만,
하지만 역시,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아. 시시해.
'내가 졌어'라고 멋지게 인정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