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새벽에 기침하느라 잠에서 깼다. 벤토린을 들이켜고 싱귤레어를 먹고.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디스커스까지 꺼내 들이켰다. 지난 늦가을부터 몇달간 계속 9시 출근을 해온 피곤함이 쌓인 데다 요 몇주 다시 담배를 피워댄 까닭이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가 있다. 내 몸은 마음을 아주 정직하게 반영한다. 입맛이 떨어지고 살이 빠지고 온갖 면역체계가 교란되는 그 뒤에 도사린 뭔가 찜찜하고 답답한 느낌. 프리랜서로 일해온 지난 1-2년 동안 거의 잊고 있었던 그 느낌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일이 많거나 어렵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 스트레스는 대부분 일에 대한 기대치랄까 도덕관 같은 게 너무 다른 사람들과 일할 경우에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원했던 것은 두가지, 도덕성, 그리고 탁월함에 대한 추구였다('탁월함'이면 더 좋겠지만 일단 '추구'라고 해두자.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듯, 우리 모두가 탁월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먼저 도덕성에 관해 얘기하자면 간단하다. 돈을 벌려면 그만큼의 노동력, 지력, 기타 그에 상응하는 댓가(내 경우에는 일지도... -_-)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충 너절하게 일해 너절한 것을 만들어놓고 '이걸로 됐다'라고 동의를 강요한다거나, 더 나쁜 경우는 나중에 그게 나한테 넘어오기도 한다. 회사 다니면서 동료, 윗사람, 아랫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을 몇몇 겪었다. 특히 인력 이동이 잦은 중소규모 에이전시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는 이런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의 시작과 끝,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확실하니까.

다음으로 탁월함에 대한 추구. 일단 위에서 말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돈을 받은 만큼의 일을 해낼 것이고, 동료나 회사에 피해는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항상'이 아님) 탁월함을 추구해야만 한다.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잡스처럼 일한다는 것'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적절하게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벽히 이해해야 합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무언가를 그냥 꿀꺽 삼키지 않고 충분히 곱씹으며 철저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열정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지요.
- p.93

이런 탁월함 얘기다.

한국과 같이 동질 집단의 영향력이 아주 큰 문화권에서는 대개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잘하나. 다 같이 데리고 좋게좋게 가는 거지.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고.' 이렇게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누구나 맡은 분야에서 탁월함을 추구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나도 더이상 나와 맞지 않는다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끌고 가려 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잔소리한다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너는 얼마나 잘나서 그래?'라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게다가 프리랜서이지 않은가. 한번 얘기했는데도 아니다 싶으면, 내가 맡은 부분 제대로 해서 넘기고 다음부터 같이 일 안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뭔가 탁월한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분야나, 시점이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지금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바로 지금이 '탁월함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할' 그 경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잘된다고 프리랜서인 내가 진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지만(그런 걸 원했으면 벌써 회사에 들어갔지 않겠나), 왠지 다른 일보다 좀더 열정과 욕심을 쏟아붓고 있다. 조금은 새로운 일이고, 쉽지 않고, 그래서 재미있기 때문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고, 욕심은 이 재밌는 문제를 '탁월하게' 풀어내서 재미있고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 정도랄까.

(다행히 지금 이 일에는 절대 포기하거나 퀄리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근성을 가진 동료, 꼼꼼한 기획자들, 매우 탁월한 감각의 아트디렉터와 디자이너들, 명민한 판단력을 가진 헤드가 있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잡스의 관점에서 보면, 택시 운전자나 요리사의 경우에는 형편없는 사람과 훌륭한 사람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훌륭한 택시 운전사는 형편없는 택시 운전사보다 기껏해야 두세 배 더 일을 잘할 거라는 게 잡스의 생각이다. 택시 운전이라는 직업에서는 실력을 여러 등급으로 나눌 수가 없다. 그러나 산업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 분야의 경우, 형편없는 직원과 훌륭한 직원 사이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형편없는 디자이너보다 100배에서 200배 더 뛰어나며, 프로그래밍 분야에서도 훌륭한 프로그래머와 평범한 프로그래머를 여러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잡스는 믿는다.
- p.133

애플의 제품이라면 무조건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소위 애플 빠는 아니나, '탁월한 것'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기준, '탁월함'에 대한 그의 취향, '탁월하게 만들기 위한' 그의 방법론은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은 사람이다.

일반 소비자 대상의 웹 서비스, 제품의 기획, 디자인 등, 일을 하면서 결정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최종 사용자(end user)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분야에서는, 사실상 모든 세세한 결정들이 중요하다. 언론, 정치, 사회, 이런 분야와는 달리, 이런 분야에서는 사용자가 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쓸 것이냐에 대한 매크로와 마이크로의 생생한 비전을 머리 속에 담고 디테일까지 혹독하게 구현해나가는 리더, 그리고 그와 꼭 같은 비전과 가치 기준을 공유하고 같이 만들어나갈 구성원들이 꼭 필요하다. 이 사람들이 있느냐에 따라,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제품, 서비스, 나아가서는 회사의 성공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있느냐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어딜 가나 대충 하자는 사람들, 복잡한 문제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들, 본질을 이해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아무런 고민도 원칙도 없이 그냥 해왔던 대로 하자고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 일은 뒷전이고 세력 다툼이나 정치 싸움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어서, 탁월함을 추구하지만 귀 얇은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창의력을 오그라들게 하고, 탁월함에 대한 추구를 접게 만든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차단해주느냐 역시 중요하다.

잡스가 'A급 선수들만 고용하고 얼간이들을 해고하라'고 한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 'A급 선수들'로 팀을 만들고 이사회나 기존 팀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하고, 엘리트주의자라고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얼간이들'을 쳐냈을, 누가 뭐래도 꺾이지 않는 그 고집이라니. 이런 방식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 전적으로 옳다고는 생각 안하지만(정치나 사회 분야에서 엄한 사람이 이런 고집과 추진력을 갖게 되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현 정권을 보라) 당시 애플의 상황에서는 맞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얼간이들과, 혹은 얼간이들 밑에서 부대끼게 하는 건 (그들의 건강을 망치는 것 외에도) 그들에게 100이란 돈을 주고 200 혹은 300의 가치를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 밖에 못 얻어내는 일이다. 아깝다. 아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여건이 갖춰진 채로 일하면 누가 성공을 못하겠나. 그럼 재미없지.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모두 (원한다면) 탁월함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고, 얼간이들로부터 자유롭고,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