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일을 시작하게 되면 다른 일을 잘 못한다. 주말에 번역이나 간간이 하는 정도인데 이것도 거의 무리다. 다른 생각을 못한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일하는 도중에는 '일 끝나면 이 많은 고민들을 글로 정리해보자' 생각하지만 일이 끝나도 잘 안된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뭔가 구구절절 생각나는 대로 써보고 싶었고 할 얘기도 좀 있었는데;;; 여기까지 쓰면서 거의 잊어버렸다(-_-).

아, 오늘 하루종일 골머리를 썩은 그 일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었지.

사람들이 나보고 무슨 일 하냐고 가끔 묻는다.
나는 일명 '기획자'다.

어쨌든, 지난 주에는 어렵게 어렵게 잡힌 사용자 인터뷰에서 이 '특정한 어떤 사람들(target user)'이 '어떤 일(핵심 task)'을 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어봤고, 어제와 오늘은 그걸 가지고 분류하고 엮어내느라고 골머리를 썩고 있다(다 못했다 ;ㅅ; 그래도 대강 감은 잡았음).

대부분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이 경우도 가지가지요 하는 일도 가지가지인데 이번 일의 특성상 내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이라 상상도 안가는 데다가 생판 다른 가지각색의 경우들이 있는 지라, 이걸 어떻게 공통된 몇개의 갈래(하위 task)로 묶어내고 그 갈래 별로 흐름을 정리할지 막막했지만, 뭐 어디 세상에 쉬운 일이 있으랴.

대개 내 일의 마지막 결과물은 화면 프로토타입이다. 고객이 요구하는 것도 그것 뿐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다른 기획자들도 고객이 요구하거나 큰 이슈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외의 결과물을 잘 만들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저 task별 흐름도를 꽤 오랜 시간, 실제로 화면을 그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고민하고, 공들여서 그린다.

각각의 하위 task별 흐름도를 가능하면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그 갈래가 갈라지는지(횡으로), 그것은 또 어떤 굵직한 단계들로 묶이는지(종으로), 그 단계들마다 사용자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들(목표, need)은 뭔지, 그 중에 뭐가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지(우선순위), 그 하고싶은 걸 방해하는 건 뭐고(pain point), 더 잘하게 해주려면 뭘 하면 되는지(대안, 아이디어), 조목조목 적는다. 위에서 언급한 이 글에서도 말했듯이, 단순하고 대부분의 경우를 포함할 수 있는 분류와 구조로 그려내야 하고, 정확한 말로 정의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 말과 그림들을 쓰고 그리면서 내 머리 속에 이 일 전체의 구조와 경중이 잘 정리된 지도를 새겨넣기 위해서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동료나 고객)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이다.

사용자 경험(UX)은 아주 큰 문제부터 아주 미세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화면을 직접 그려본 사람이라면 그 화면 구석구석에 크든 작든 사용자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필요로 하는 무수한 이슈들이 있음을 알 것이다. 잘 정리된 지도가 머리 속에 있다면 그 결정들은 쉽다. 저 지도를 제대로 그려내고 이해시켰다면 동료나 고객의 설득 역시 문제가 없다. 화면 따위, 와이어프레임 따위, 프로토타입 따위,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저절로 그려진다.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그걸 만든 사람이 저 지도를 제대로 안 만들었고, 그래서 나쁜, 근거 없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일 확율이 55% 정도?(근거는 없다. 내가 숫자엔 좀 약해서;)

아오.

눈알이 빠질 것 같아.
흰머리는 또 얼마나 늘었을까.
나중엔 머리 속이 하얗게 돼버려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기까지 하더라니까(그래서 이 글 쓰기 시작함).
이런 것도 모르고 우리 고갱님들은 막 왜 화면 아직도 안나오냐고 막 그러면 이런 얘길 구구절절 해줄 수도 없고 참. 애환이 있지. 뭐 지금 고갱님이 그런다는 얘긴 아니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