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 2016-07-23 17:20 나는 놀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일을 하다가 일이 없을 때 노는 게 아니라 놀다가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돈을 벌지 않는 지금과 같은 나날, 이 시간들이 제일 중요하다. 지금 하는 일들, 고양이와 놀고, 농사를 짓고, 책을, 영화를, 전시를 보고, 숲속을 산책하고, 늘어지게 자고, 맛있는 것을 먹고, 여행을 다니고, 잡문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런 일들이 내가 인생에서 제일 하고 싶은 일들이고, 이걸 하기 위해 기꺼이 인생의 시간을 쪼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받은 돈 만큼의 가치, 혹은 그 이상을 고객에게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도둑놈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육체노동처럼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양의 일을 하고 '시간당'이나 '일당'으로 비용을 받는 성격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 뇌를 바쳐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 일이다. 나는 필요할 때 언제든 불러서 최소의 기간에 최대의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는 '자원(소위 m/m)'이 아니다.

    그래서 단기간에 작업하고 빠지는 제안서나 보고서 작업 같은 건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1주일 짜리 작업이라도 내가 들일 노력과 받을 스트레스는 2-3개월 짜리 프로젝트 못지 않을 거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RFP'를 받고 1-3주 만에 써내는 '제안서'라는 게 무슨 내용을 다룰 수 있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그런 의미없는 일들에 쪼개어 쓰고 싶지 않다.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한 고객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건 정말, 정말 다른 얘기다. 도움을 청할 때는 일을 '시킬' 때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이런 걸 정말 잘하는 무서운 고갱님이 몇몇 계시다;;)

    일을 시키는 입장과 일을 하는 입장(한국에서는 '갑'과 '을'이라고 표현한다)이 다를 수 있다.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갑'의 입장에서는 좀더 적은 돈으로 좀더 많은 일을 시키고 싶을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 입장이 되어본 적이 있어서 충분히 이해한다.

    사람은 자기가 서본 적 없는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갑'만 해본 사람은 '을'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한국 같이 수직 관계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이해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 프리랜서로 다양한 수준과 유형의 고객과 일하다보니 이렇게 '갑'만 해본 고객과 일하기가 근본적으로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일을 할 때도 관계의 기본은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 다양한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상대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도움을 청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상대방을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것, 즉 상대방이 무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게 중요한 건 돈보다는 신뢰, 솔직함, 일의 중요도, 그리고 딱히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인간적 선호도(;;)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