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남천안

일.work 2005. 9. 12. 22:51

자, 여기는 천안.
마침 나의 고양이들이 나의 귀여운 랩탑 P1120을 부셔놔서, 크고 튼튼하고 무거운 윤수의 IBM 노트북을 빌려서 이고지고 여기까지 왔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만개의 전선다발이 있고 기계가 웅웅거리고 에어컨의 칼바람이 눈을 베는 서버실에 하루종일 있자니 나중엔 헛구역질이 다 났다. 하루의 임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를 완료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천안 시외버스 터미널 옆 베이커리+커피숍에 들렀다. 이렇게 일이 끝나고 외부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이 나에게는 외근의 백미라 하겠다.


천안은 웬지 활기에 넘친다. 듣자하니 얼마전 지하철역이 개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름도 이상한 커다란 백화점 옆 갤러리에서는 Jonathan Meese라는 작가의 전시가 진행중이고, 거기 딸린 운보라는 이름의 이 커피숍 역시 크고 화려하다. 케잌도 괜찮고 종업원들도 친절하다. 그러나 커피맛은 그다지. 이고 흡연석과 금연석이 따로 있지만 아무런 벽도 환기시설도 없으며, 무선랜은 당연히 되지 않고, 주위엔 나이드신 분들이 '부동산과 법'에 관한 심각한 얘기들을 나누고 계시다...
나와 상관없는 장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나와 상관없는 얘기,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는 테이블.


예전에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yuna는 너무 슬로우해요. 다른 사람들처럼 욕심이 안 나나요?
그때 난 뭐라고 했던가.


나는 산다는게 어딘가 확연히 더 높고 좋아보이는 곳을 찾아서 껑충껑충 계속 뛰어야 하는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사람과 일과 세상에 관해서 뭔가 깨닫고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미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삶이 목을 조여올 때.
그따위로 느긋하게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위협할 때.
양키스 모자를 쓴 코쟁이처럼 커다란 집게손가락을 들어 나를, 그리고 저 높은 곳을 가리킬 때.
나는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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