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멘님이 번역한 존 버거의 책을 내내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천천히 읽었다.
아름답고, 묘사적이고, 조용하고, 슬픈, 긴 시간과 짧은 시간들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
'제7의 인간'에서, 느린 단조의 배경음악이 흐르는 흑백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하던 그 느낌이좀더 개인적인 영역으로 넘어간 느낌.
무더운 한길가, 흙먼지, 나 혼자였던 그 짧은 여행을 기억한다.
리스본에,크라쿠프에가보고 싶다.
지금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여행에 관한 책은 당분간 그만 읽어야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여행에 관한 책은 아니다)
리스본.Lisbon
사우다드.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면서, 그리고 마치 봉투를 쌓듯 정교한 이야기를 조리있게 풀어 가는 어느 술꾼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지나치게 차분하게 하는 걸 들을 때 생겨나는 분노의 감정이 바로 사우다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두는 잊지 못할 음악이다. 아마 리스본은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일 것이다. 아마 망자들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이곳에서 자신들을 좀더 과시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가이며 리스본을 깊이 사랑한 안토니오 타부치는 이곳에서 꼬박 하루를 망자들과 보냈다.
-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21~22 페이지
리스본.Lisbon
이젠 너무 늦었어! 이건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말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말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접히는 방식 - 나는 이걸 네 살 때쯤부터 깨닫기 시작했는데 - 즉 구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그 시간의 주름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머니는 그 세 마디를 가볍게, 아무런 비애감도 없이, 마치 물건 값을 말하듯 얘기하곤 했다...
리스본 사람들은 감정이나 기분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는데, 여기 말로 사우다드라고 하는 이 말은 보통 향수로 번역되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다. 향수는 편안함, 심지어 나태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리스본은 한번도 그걸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향수의 중심지는 베니스다. 향수에 빠지기에는 이 도시는 너무나 많은 바람에 시달려 왔고, 지금도 그렇다.
사우다드.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면서, 그리고 마치 봉투를 쌓듯 정교한 이야기를 조리있게 풀어 가는 어느 술꾼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지나치게 차분하게 하는 걸 들을 때 생겨나는 분노의 감정이 바로 사우다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두는 잊지 못할 음악이다. 아마 리스본은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일 것이다. 아마 망자들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이곳에서 자신들을 좀더 과시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가이며 리스본을 깊이 사랑한 안토니오 타부치는 이곳에서 꼬박 하루를 망자들과 보냈다.
- 21~22 페이지
모든 게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요.
당연하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니? 두려움이 없거나 자유롭거나 둘 중의 하나지, 둘 다일 수는 없어.
- 30 페이지
대형 수산시장은 희한한 곳이다. 일단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한 예로, 물고기들은 죽을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많을 수록 몸이 더 크다. 길이가 이 미터인 육십 년 된 가오리는, 우리에겐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이 왕국의 나이, 상대적인 불변성, 복잡한 먹이사슬 등은 어쩐지 겸손한 마음이 들게 한다.
- 38~39 페이지
그녀는 내 가슴이 저 먼 밀짚의 바다라도 되는 듯이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47 페이지
제네바.Geneve
... 제네바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곤경과 위로의 순수한 다양성에 매혹된 옵서버이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 상황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더라도, 제네바는 '알아요'라고 나직하게 말한 다음, 이런 말을 차분히 덧붙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거기 좀 앉아요, 가서 뭘 좀 가져올게요.
- 69 페이지
...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남들이 보라는 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데에도 생각이 일치했다. 의미는 비밀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이었다.
... 길을 거니는 몇 안 되는 사람은 대부분이 노인네들이고 몽유병자 같은 느릿한 리듬이 몸에 뱄다. 그래도 아파트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오는 걸 좋아하는 까닭은, 이런 더위를 혼자서 감당하려면 훨씬 더 숨이 막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되는 대로 걸어 다니다가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아이스크림이나 살구를 먹는다. (그 여름엔 살구 농사가 십 년 만에 최고였다)
- 71 페이지
==> 이 구절들은 그 뜨거웠던 캄보디아의 거리를 생각나게 했다.
크라쿠프. Krakow
그답기 그지없는 이런 얘기를 들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난다. 그의 여행, 늘 만족시키려 노력했으며 결코 억누르지 않았던 그의 취향, 그의 고단함과 슬픈 호기심을 사랑했던 나의 마음이.
자세가 조금 지나치게 꼿꼿해. 그가 되풀이해서 말한다. 하지만 상관없어. 모사를 할 때마다 뭔가는 달라져야지, 안 그래?
환상이 결여된 그의 시각도 사랑했었다. 그는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환멸도 겪지 않았다.
- 85~86 페이지
==>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다면 그건 좋은 걸까
... 그런데 이제야 그걸 이해한다. 우리는 이 순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노비 광장에서 대등해진 것처럼 그때도 그랬다. 내가 노인이 되고 그는 죽으리라는 걸 내다봤고, 이것이 우리를 동등하게 만들었다.
- 92~93 페이지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 마르셀 프루스트 <스완네 집 쪽으로>,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 파티>,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헨리 밀러 <북회귀선>... 프레데릭 트레브스 <엘리펀트 맨>,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파리에서 출간된 영문판)...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고난의 성자 요한.
- 93 페이지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살면서 후회하지 않은 많은 것에 대가를 치렀다.
- 94 페이지
인생 자체가 스탠드업 공연이라는 음모적이고 불경한 암시 같은 것!
- 95 페이지
문맥(컨텍스트) 밖으로 떼내어져 발췌된 구절(phrase)의 불완전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요즘 나의 발췌는 점점 길어져만 가는 것 같다. 노쇠해가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점점 길어져 가듯이. 사실 이젠 처져만 가는 나의 기억력에 대한 걱정 때문이겠지.
바닷물이 멀찍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처럼 주름진 잠.
- 101 페이지
노비 광장에서, 훔친 헤어드라이어, 오렌지 절임이 든 허니브레드, 줄담배를 피우며 드레스를 파는 여자, 이제 바구니를 얼추 비워가는 야구시아, 금방 무르기 때문에 빨리 팔고 금세 먹어야 하는 검은 체리, 소금에 절인 청어, 시대에서 흘러나오는 에바 데마르칙의 저항의 노래 속에서, 나는 비로소 그의 죽음에 가슴이 저며 온다.
- 104 페이지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 Some Fruit as Remembered by the Dead
자두
섭씨나 화씨로는 잴 수 없는 온도, 햇빛에 둘러싸인 어떤 시원함의 온도, 어린 사내아이가 꽉 쥔 주먹의 온도.
- 109 페이지
5 아일링턴. Islington
6 퐁다르크 다리. Le Pont d'Arc
예술은 낳자마자 걸을 수 있는 망아지처럼 태어나는 것 같다.
- 136 페이지
이 동굴 벽화들은 어둠 속에 존재하도록 바로 그곳에 그려졌는지 모른다. 이것들은 어둠을 위한 그림이었다. 이것들은 보이는 모든 것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어쩌면 생존을 약속하도록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 141 페이지
7 마드리드. Madrid
8 슘과 칭. The Szum and the Ching
도로 표지판을 볼 때문 종종 동화 속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중 굽은 길, 사슴 출몰 지역, 십자로, 평면 교차로, 환상 교차로, 낙석주의, 낭떠러지, 방묵 지역, 사고 다발 회전길.
인생의 위험에 비하면 도로 표지판의 경고는 오히려 단순함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것 같았다.
- 159 페이지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161 페이지
... 그리고 오토바이용 부츠는 일단 벗어 놓으면 그것만의 존재감을 갖는다. 이 신발이 독특한 이유는... 그 이유는 그걸 벗을 때 우리가, 그 부츠와 내가 함께 달려온 몇 천 킬로미터의 길 옆으로 내려서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 171 페이지
미렉의 집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집에서 먼지, 나무 연기, 그리고 고사리 냄새가 난다...
- 175 페이지
토요일 오후는 아주 길었다. 시간은 자비롭게도 멈춘 것만 같았다. 슘 위에 놓인 널찍한 다리에 이렇게 누워 눈을 감으니, 두 강의 소리가 합쳐지면서 자그마한 벌레들의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높은 가지의 나뭇잎 소리들이 섞여 든다. 그리고 두 강의 흐름 속엔 똑같은 무심함이 담겨 있다.
- 184 페이지
묘사하기
... 털이 억세고 담배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개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걸 기억할 수 있다면 다른 방의 기억을 떠올려서 다시 들어가 볼 수 있을 텐데.
- 187 페이지
후안, 이 칼을 열어 보면 햄릿의 물건 같다는 생각이 들 걸세. 욕망의 인식과 더불어 그 욕망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나란히 흐르는 칼. 우유부단한 칼. 열든 닫든 이 칼날은 늘 후회를 품고 있지.
- 191 페이지
로자 룩셈부르크
- 216 페이지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 224 페이지
인간의 특징들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부서지기 쉬움이다. 이게 없는 경우는 없다.
- 225 페이지
... 인간의 몸만이 벌거벗을 수 있고, 밤새도록 살을 맞댄 채 함께 잠들고 싶어하며 그래야 하는 것도 인간뿐이다. 치마.
- 22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