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고통의 바다


십년 전인 2016년 지인의 소개로 ‘불한당’(불교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공부 모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도법스님이 내게 왜 불교를 공부하려 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당시 내가 처했던 삶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삶이란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이며, 나는 왜 살아야하는지, 이 삶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싶다고 말씀드렸었다.

2013년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40대 초반이었다. 언젠가 내가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다. 나의 삶 뿐만 아니라 내게 소중한 모든 것에, 아니 세상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것을. 삶은 부질없는 노력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엄혹한 고통으로 가득해 보였고, 아무리 낙관적인 눈으로 바라봐도 그 고통이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수술로 암을 제거하고 몸은 치유됐지만 그후 몇년 간 나는 깊은 허무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나와 너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피곤과 분노, 내 바램과는 달리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슬픔, 미래에 대한 온갖 걱정과 불안이 삶을 짓눌렀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결국 늙고 병들고 죽을 걸 알면서 어떻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을까? 부질없고 힘든 이 삶을 굳이 살아가야 할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이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한가? 이 의문들에 대해 답을 얻기 전에는 어디로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 지금까지의 십년은 삶의 안팎에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난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삶은 소용돌이쳤고, 사랑하는 것들은 하나씩 내 곁을 떠났고,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았고, 살고 싶었다. 나는 아마도… 잘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잘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불한당에서 경전 공부를 하는 것 외에도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10일 코스를 다녀온 뒤 명상 모임을 만들어 선생님, 도반들과 함께 명상을 했다. 여러 스승들의 책과 글, 강연을 찾아 읽고 들었고, 2019년에는 요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무관해보이던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하게도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도) 하나로 수렴했다. 경전의 말들은 ‘개껌던지기’(생각의 흐름을 끊는 방법 중 하나. 3편 참고)와 명상을 통해 몸의 경험이 되었고, SNS와 단톡방에 올라오는 소공님, 용수스님, 그리고 실상사 스님들의 글과 도반들과의 대화는 매일의 삶을 비추는 빛이었다. 요가는 그 모든 변화의 조용한 기반이었다. 몸이 곧 마음이니 몸이 변하면서 마음도 변했다. 이 얘기들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조금 더 자세히 해볼까 한다.

7년 수행의 끝에서


2017년 여름 불안, 우울, 슬픔 같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끊는 연습을 시작했다.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몸을 바꾸듯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마음, 곧 뇌의 구조나 작동 방식을 재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수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아니었다. 스님들이나 수행자들이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게 수행이구나 했다. 붓다가 ‘깨어있는 마음의 효과가 나타나고 능숙한 상태들을 계발하는 데는 적어도 7년은 걸린다’고 했다는 얘기나, 7년이면 인간의 몸의 세포가 모두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나름대로 정한 기간이 7년이었다. 원래 2024년까지인데 계산에 서툰 나는 어쩐 일인지 그 완성(?)을 2025년으로 생각해왔고, 그게 작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지금 나는 7년 전 알고 싶었던 것들을 알았고, 알아야 할 것들도 알게 되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 간극이 저절로 좁아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엄청나게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된 건 아니지만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만족스럽다'(도법스님의 책 <지금, 당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의문의 기록


어째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안에는 항상 의문들이 있었다. 불교를 공부하기 전부터도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미미한 지력으로 그런 의문들의 답을 찾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의심도 많아서 내 몸이나 삶에 직접 적용해보고 난 후 ‘정말 그렇네’하는 사람.

불교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던 의문들과 연이어 생겨난 의문들에 대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답을 주었다. 불한당에서 도법스님에게 붓다의 생애에 대해 들으면서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붓다가 가졌던 의문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 주변에는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비슷한 의문을 가져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의문을 붙들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매번 답을 알려주는 어떤 일, 혹은 누군가,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드러났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간 책의 한 구절, 누군가의 말, 명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느낌과 생각들에서 의문에 대한 해답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억지로 답을 찾지 않아도,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찾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나의 질문을 정리하고 나서 ‘그렇다면…?’ 하는 식으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는 ‘사고형 & 문제해결형’ 인간인 나는 이렇게 찾은 답을 실제 삶에 적용해보고, 돌아보며 정리하고, 그렇게 사고의 탑을 쌓으며 나아갔다. 새로운 의문이 생기면 이전에 쌓은 탑에 이리저리 맞추어보고, 탑 위에 새로운 벽돌을 올리거나 필요하면 탑을 고치거나 아예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쌓는 과정을 계속했다. 어떤 질문은 몇년을 품고 있었고, 어떤 의문은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내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통감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SNS에 그때그때 남겨왔다. 7년 수행의 끝이었던 작년 말, 내가 먼저 걸어간 사람들의 자료를 찾아보며 더듬더듬 나아갔듯 십년 전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이들, 특히 나같은 성향이나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가 남긴 기록이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025년 장장 1년 동안 쉬지 않고 밥벌이에 매진했으니 이제 시간을 좀 내서 그 기록들을 정리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내가 공개적으로 남기는 기록의 오디언스와 목적은 두가지다.
1. 미래의 내가 필요할 때 찾아볼 수 있게,
2. 언젠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이들이 필요할 때 참고할 수 있게.

10년 치의 기록들을 뒤지며 지나온 궤적을 돌아보는 일은 죽을 힘을 다해 막 빠져나온 깊고 검은 우물 속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 기록이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 중 단 한사람에게라도 가 닿을 수 있다면, 그에게 아주 희미한 등불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게 불한당에 처음 들어갔던 날 도법스님께 말씀드렸던 마지막 의문, '이 삶으로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가 얻은 답이다.

————-
다음 글 : 2. 불한당과 도법스님

—————

* 이 글은 브런치에도 같이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