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2022-04-05 18:18 9년 전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부모님과 형제들, 가까운 지인 몇명 외에는 알리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sns에 글도 쓸 수 없어서 다른 서비스에 계정을 만들고 검사와 치료와 그때그때의 심정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암이 그렇듯 유전자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았고, 잘못 살아온 것만 같았고, 형편없는 루저가 된 것처럼 느꼈다. 수술과 치료 이후에도 병이 걸렸던 걸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아파 보이고 싶지 않았고,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절 새로운 sns에 쓴 글은 대부분 우울과 절망의 기록이었고 몇년 후 서비스가 망하면서(두군데였는데 이상하게 다 망함) 다 없어졌다.

생존율이 비교적 높은 암이었기 때문에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걱정이 컸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물론 했다. 한번은 들판에 나갔다가 파노라마 앱으로 주위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발 밑을 찍을 때는 옆으로 살짝 비켜 서서 사진에 발이 나오지 않게 했다. 그날 내가 찍었지만 내가 없는 그 파노라마 사진을 몇번이고 돌려 보면서 내가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다는, 아니 언젠가 나는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생전 처음 했다. 그 생경한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엔 많은 것이 달랐다. 자괴감이나 우울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다. 암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나쁜 생각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9년 전의 암은 생존율도 높았지만 몸에서 아무런 증상을 느낄 수 없었던 데 반해 이번엔 몸에서 계속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랫동안 연습했던 평정심은 몸에서 나쁜, 아니 나쁘다고 생각되는 신호가 오면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카페나 자료를 검색할 때마다 몸 속에서 무시무시한 시한폭탄이 재깍거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점점 커졌다. 난소암이 조기 발견이 어렵고 생존율이 낮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난소암 진단을 받고 몇달 만에 돌아가신 막내 이모 생각도 났다. 지금까지 뭘 했나 하는 후회가 컸다.

지난 몇년간 몸에 대한 내 마음의 지배력이 훨씬 더 강해졌는데(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이게 내게 독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3월 중순 아산병원의 검사와 진료가 있던 날 아침엔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생각만으로도 몸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희망이라던가 방향, 목표 같은 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고, 그것들이 아예 의미 없어졌을 때 내 마음은 내 몸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죽여 없앨 수 있다는 걸.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었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마침 sns에 #중년일기 라는 태그로 중년에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터라, 글을 읽고 먼저 연락해준 지인들도 있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하기도 했다. 형제와 친지들, 명상 선생님, 요가 선생님, 옛 동료들, 오랜 친구들, 그리고 지금의 동료들까지... 우리가 한때 공유했던, 공유하는 삶의 시간과 경험들에 대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정작 연락해서 한 얘기는 나 아프다고, 불안하고 무섭다고 징징거린 게 대부분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랬다(모두들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예전에 아팠을 때는 아픈 나 밖엔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병원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거리의 사람들, 출퇴근길 전철 안의 사람들에게서도 모두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연민과 위안을 느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조금 희망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스트레스로 최악의 상태였던 몸도 조금 나아졌던 3월 어느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태어나서 처음인 것만 같은 매우 포근하고 따뜻한 안도감을 느꼈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가 힘든데… 기억은 안나지만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안도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를 보호해줄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있어서 아무 걱정 없이 포근히 잠을 잤을, 아주 어린 시절. 누군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주거나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 우리들이 같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안심이 되고 좋구나 싶었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아서 혹은 내가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그저… 이전처럼 무섭지 않을 것 같고…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종류의 깊은 안도감이었다. 지금도 가끔 새벽에 잠에서 깨면 왈칵 불안이 몰려오는데, 그때의 느낌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3월의 불안에 시달리던 밤 '난소암만 아니라면 앞으로 진짜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몇번이나 되뇌었는데... 진짜 착하게 살아야지. 나도 따뜻한 손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지. 가능하면 나도 이모처럼 오래 살아남아서 나중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얘기를 해줘야지.
이 글도 그래서 쓴다.
내가 없는 나중에라도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오늘도너무길어진 #중년일기_yuna

2022-04-05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