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까리 님의 미투데이에서 보고 찾아서 보게 된 SBS 스페셜 <산티아고로 가는 길>. 보면서 작년에 걸었던 길과,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 나무들과, 길에서 먹었던 개복숭아와, 오미자와, 왼발 네째 발가락에만 두번이나 생겼던 작은 물집, 그런 것들을 떠올렸다.

40일 동안 끊임없이 걷는 까미노 순례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태백산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에서부터 시작해 한달에 이틀, 하루에 25km씩을 꼬박 걸어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보구곶리까지 514킬로미터를 걷는 여정이었다. 물론 난 중간부터 들어간 데다가 그나마 중간중간 아픈 발과 천식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적도 몇번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걸었다(고 생각한다 ^__^).

글쎄, TV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것처럼 한적하고 멋진 경치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례길도 아니고, 지치면 햇살이 내리쬐는 풀밭에서 맨발로 기타를 두드릴 수 있는 낭만의 길도 아니었다. 강원도 쪽에는 물론 멋진 경치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바로 옆으로 차가 쌩쌩 지나가는 좁은 갓길로 걸어야 할 때도 많았고, 서울이 가까워오면서는 주말에 놀러가는 차들이 정체길에 내뿜는 매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신 안오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에 또 가고, 또 가게 되었네. 어떤 성취감, 힘들었던 마음의 짐 같은 것을 조금 내려놓은 느낌 때문이었는지,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그 따뜻하고 조용한 느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힘들게 걷고 나면 나왔던 달콤한 막걸리에 혹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걷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살만 지나면 할 수 있는 일이니 "내 경력이 00년이야"라고 자랑할 일도 없고, 걷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더 비싼 장비를 가졌다고 자랑할 일도 없으며, 더 잘 걷고, 더 빨리 걷고, 더 우아하게 걷는다거나 하며 자랑할 일도 없다. 어른 아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그저 걷는 것 뿐이다. 못 걸었다고 해서 질타할 사람도 없고. 확실히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세상에도 내게도, 그 누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골프나 카 레이싱, 낚시, 꽃꽂이 같은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걷는 길은 또 다를 것 같다. 길을 잃을 염려와 길 위에 도사린 여러 위험들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혼자나 아주 가까운 누군가와 둘이서, 긴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꼭 그 끝에 산티아고 같은 유명한 목적지가 있지 않더라도, 아주 좋은 경치가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길 잃을 염려 없이, 차에 치일 염려 없이 마음놓고 걸어갈 수 있는 아름답고 유서깊은 길 하나쯤 있어서, 일상에 지쳐도 달리 즐길 줄 아는 것도 그만한 돈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 천천히 걸으며 일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멀쩡한 땅을 파서 물길 만드는 식으로) 거창하게 새로 길을 만들거나 할 것은 없고, 그냥 지금 남아있는 옛 길이라도 없어지지 않도록 보존해주었으면 좋겠다. 10년 전부터 우리땅 걷기 모임을 꾸려오고 있다는 신정일 선생님이 왜 끊임없이 이 모임을 계속하고, 우리 땅을 걸어 돌아다니고, 그 길을 소개하는 책들을 내고 있는지, 왜 한국의 옛 길들을 지키고 복원하자고 주장하고 있는지,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조금은 이해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기 때문에 천년이 지나도 이 길이 남아있는 것이라지 않나.

사람들의 인생이 좀 덜 팍팍해지고, 사람들의 쓸데없는 욕심도 좀 더 작아졌으면 한다. 우린 뭘 위해서 막 달려가는 게 아니라 그저 길 위를 저마다 자기만의 속도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것뿐이라는 진리도, 가끔이나마 이렇게 걸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만난 해리 윤이라는 재미교포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어디 주변에 이런 남자 좀 없냐).

저는 물건들에 대한 소유욕이 생겨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새 차나 집, 그리고 그 집을 채울 많은 물건들을 생각하게 되죠. 까미노를 걸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많은 것들이 사실은 오히려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올해 우리땅 걷기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까지 걷는 일정이 잡혀있다던데, 아마 올해도 계속 참가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관한 글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생각한 것처럼 쉽게 손에 잡히질 않는다. 생각이 정리가 덜 된 것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 단순히 시간이 나질 않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깨닫고, 원칙을 세우고, 실천해가는 과정일텐데, 나 지금 그걸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살고 있는 것일까.


10월 두번째 참여때. 양수리(사진은 '아타'님).

11월 세번째 참여때. 서래섬이던가.


12월 네번째(마지막) 참여

그때 외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주인아저씨가 저 난로에 고구마를 노랗게 구워주셨다.

바다가 가까워졌을 때.
김포 '애기봉' 에서는 북한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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