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집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번에 한 사람씩. - 79 페이지. 마더 테레사의 시
별로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은 연령층과 직업인에게까지 당근이 당연으로 일반화됐다는 걸 느끼면서 그럼 정작 당근은 뭐가 되나 걱정이 됐다. - 121 페이지 <말의 힘>
...그분은 편안하고 반듯한 우리말을 구사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극적인 억양 없이 쉽게 말했을 뿐이었다. 고인에 대한 공경과 추모도 과공에 흐르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겸사에도 지나침이 없었고, 포부를 말함에 있어서는 솔직하고 당당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청중을 웃기려고도, 홀로 빛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간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듯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들으면서 저런 화법이야말로 진솔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구나 싶으면서 잃었던 걸 찾은 것처럼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 123 ~ 124 페이지 <말의 힘>
성령의 힘이랄까, 2천 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종교가 관습화되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거듭하는 힘에서 가톨릭의 위대성을 느낀다. - 174~175 페이지 <그는 누구인가>
열 살 될 때까지 할머니가 생일날 꼭 먹이고 싶어했던 수수팥떡도 붉은 빛깔이었다. 떡도 생생한 붉은빛이었지만 팥도 거피하지 않은 붉은 팥이어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 떡을 안 해주면 큰일 날 것처럼 정성스럽게 챙기는 할머니의 태도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태어난 손녀에게 따라다닐지도 모를 煞을 제해주고 싶은 주술적인 의식의 기미 같은 게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가. - 181~182 페이지 <음식 이야기>
=> 지하철에서 여길 읽다가 할머니랑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었어.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맛은 반세기도 너무 전의 고향의 소박한 밥상뿐 아니라 뭐든지 넝쿨 달린 것들은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를 선연하게 떠오르게 만든다. - 187 페이지 <음식 이야기>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한글은 '가'는 가라고밖에 읽을 수 없는 까닭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서 소리가 되나 하는 이치만 알면 그 다음은 그야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게 돼 있었다. 나는 일본의 '가다가나'의 글씨들이 왜 저를 '가'라고 또는 '아'라고 주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덮어놓고 외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나는 꼴찌를 못 면했고 학교생활이 지옥 같았다. - 194 페이지 <내 소설 속의 식민지 시대>
=> 내말이 바로 그말이라니까요. 일본어란 도대체.
그런 자기모멸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 동족상잔에 대한 혐오와 이념에 대한 허망감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노릇을 하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되어 저로 하여금 많은 작품을 쓰게 했습니다. - 209 페이지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문자를 해독하게 해주는 일은 학교라는 집 밖 세상에 내 자식을 내놓으면서 그 문을 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도 내 자식이 문 열고 나가 부딪힐 몇 겹의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우호적이길 바랐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아마 점점 비우호적인 세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간판을 읽으면서 배운 친절과 배려, 그림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동물과 식물 곤충하고까지 소통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한없이 놀랍고 아름답고 우호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이 힘이 되길 바랐다. - 214~215 페이지 <내가 문을 열어주마>
내가 처녀작을 쓸 때, 잘 안써져서 때려치울까 하다가도 이게 만일 당선이 돼서 내가 신문에 나면 엄마가 얼마나 으스댈까, 아마 딸 기른 보람을 느끼겠지, 하는 생각이 채찍이 되어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 225 페이지 <우리 엄마의 초상>
관의 혜택을 받은 적 없다고 큰소리치는 학자치고는 드물게 대중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억지로 꾸미거나 티내지 않고 천성인 양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는 그야말로 실로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니겠는가. - 236~237 페이지 <평범한 기인> 이이화 선생
그가 돌에게 한 짓은 상처에 물을 주어 물풀이나 이끼를 키우게 하는 일이었다. 그가 돌에게서 찾고 싶어한 것은 숨어있는 형태가 아니라 더 깊이 숨긴 돌의 꿈이 아니었을가. 돌의 꿈은 흙의 꿈보다 훨씬 더 연하고 수줍은 원초적인 녹색이다. - 240 페이지 <중신아비> 조각가 이영학
그리고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 이야기와, 김상옥 선생, 이문구 선생을 보내며 쓴 글들, 그리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늘 뭔가를 시키고 부탁만 해서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하겠다. 만약 엄마가 더 늙어 살짝 노망이 든 후에도 알량한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괴발개발 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노망이 될 테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네가 모질게 제재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 263 페이지. <딸에게 보내는 편지>
박완서님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생전 처음 듣는 한국말들이나 소름끼칠 정도의 은유와 묘사에 놀라게 되지만, 이 책은 아무래도 여기저기에 발표한 잡문과 수필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좀더 편안하고, 솔직하고, 그리고 조금은 소심하다. 슬며시 슬며시 웃음짓게 하고, 눈물나게 하는, 할머니 글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