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찌그러진 달

잡글.blarrr 2004. 9. 26. 23:00

난 이 집이 좋았다.
남쪽과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 집.
낮엔 따뜻한 햇살 아래 고양이들이 침대 위에서 잠들고, 해가 질 무렵엔 모니터 너머로 예쁜 석양이 보이던 집.
그리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온 내겐 저멀리 한강을 가로막은 무지막지한 아파트촌의 불빛들을 보여주던 집.
동쪽으론 다용도실이있어 궁상스럽게나마 고양이들에게 해를 주지 않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집.


천성이 정이 없지만, 어찌어찌하여 내 곁에 들어온 생명체들을 내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 집엔 여러 종류의 생물들이 같이 산다. 대개는 서로 해를 주지 않지만, 이번에 나와 살게 된 고양이들은, 선인장 잎사귀들을 씹기도 하고, 달팽이 집 안에 고개를 밀어넣기도 한다.



이 선인장.
이전의 네가 발렌타인데이에 들고 와 조금은 나를 감동시켰던 이 선인장이 이렇게 많은 화분들에 싹을 내릴 줄은 나도 몰랐다.


이 달팽이들.
삼겹살 구워먹자고 사온 상추잎에 붙어있던 달팽이.
회사 동료가 퍼온 흙 안에 들어있던 달팽이.
더운 여름날 놓아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제 조금있으면 떠나야만 한다.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집에, 이렇게 작은 집에 이사왔던 첫날, 행복해하던 그날이 생각나.


나는 그리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꿋꿋하지도, 그렇게 청렴하지도, 우아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내가 했던 그 수많은 못된 짓들,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수들, 내 곁에서 살다가 죽어간 생명들.
모두 나를 조금은 용서하라.
그렇다고 앞으로 내가 똑바로만 살 거라고 기대하진 마라.


바보같이 찌그러진 달이 구름 사이로 왔다갔다 한다.
내일이면 똥그래질 달이지만, 항상 똥그란 채로 있는 건 아니다.
나도 노력은 하지만, 항상 동그랗게 이쁘게만 사는 건 내겐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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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lyer 2004.09.27 0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쁘고 동그랗게 사는 것.... 저는 가끔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 ㅎㅎ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2. BlogIcon Maya 2004.09.28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그랗지 않아도 이쁠 수는 있을 거예요 ㅋㅋ 유나님은 맨날 안착하신 척 하지만 그래도 만나보면 착하시던데 ㅎㅎㅎ

  3. BlogIcon 휘발성고양이 2004.09.28 1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 이사갈 집도 전망 쥑여주고 좋드만 머.

  4. BlogIcon 노엘 2004.09.28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싱크대 위에 화분이 있는 건 처음 보네요. 괜찮은데요?

  5. BlogIcon yuna 2004.09.28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lyer / 누구나 동그랗고 이쁠 때가 있지 않을까요? 전 그런 때는 이미 많이 지났습니다만 플라이어님이야 뭐... 후훗Maya / 착한 줄 아셨다면 으흐흐... 오산이오.휘발성고양이 / 전망 말고 다른 것은 좋을 게 없으니 말예요.노엘 / 괜찮은가요? 아직까진 고양이들이 못올라가는 유일한 곳이 씽크대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덕분에 요리 따위는 모두 포기.

  6. BlogIcon 휘발성고양이 2004.09.29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얼핏 뉴스를 들어보니 오피스텔에서 아이가 떨어져 죽었다며 오피스텔의 안전문제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떠들던데...

  7. BlogIcon yuna 2004.10.04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엇, 고층 오피스텔은 창문이 굉장히 조금밖에 안열려서 사람이 떨어질 수가 없을텐데... 어쩐 일일까요.

  8. BlogIcon ぎく 2004.10.04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동그랗고 이쁘게 살 순 없지만 그래도 조금쯤 모나게 사는 것도 괜찮잖아요. 괜찮아요. 썩 나쁘지 않다구요.

  9. BlogIcon proxyoff 2004.10.12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안착한게 yuna님 답다고 믿어요. 흠흠!! 착한건 능력도 없고, 인기도 없고, 매력도 없는 사람이나 붙이는거래요. (후환이 두려워 사족을 붙이고마는군)

  10. BlogIcon yuna 2004.10.12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사족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