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홍상수 감독에게서는 더이상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의 날 것의 소름돋는 생경함이나 찝찝함 같은 것들을 볼 수 없다. 문득 이사람 영화를 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고(마지막으로 본 게 '생활의 발견'이었던가), 왜 더이상 그의 영화를 안보게 되었는지까지 알아버렸다.

그리고 나서 최근에 본 것이 '옥희의 영화'와 이 영화 '하하하'.
홍상수라는 감독은 인간 삶을 영화라는 도구를 써서 그리는 데 있어 나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읽은 배수아의 '북쪽 거실'처럼, '이해하고 말겠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고 그저 꿈을 꾸듯 따라가다 보면(우리는 꿈을 꿀 때 아무리 불가사의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라도 그저 인정하거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묘하고도 우스꽝스럽고 겸연쩍고 구차한 장면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살찐 뱀'같이(이 영화에서 문소리가 김상경에게 붙여준 표현) 집요하다가도 감당 안되는 부분에서는 '하하하'하고 잔을 부딛히며 스리슬쩍 빠져나가는 경지. 거기에 영화 중간에 이순신 장군이 느닷없이 나타나 주인공에게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거기 가장 나쁜 것이 들어있어'라고 말한다.

배우 이은주가 자살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녀가 너무 어둡고 슬픈 영화에만 출연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끌고 간 우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무래도 '주홍글씨'였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에서도 밝고 유쾌한 역할은 아니었지. 감독들은 어째서 그렇게 그녀 안의 어둡고 슬픈 면들만 끌어내었던 것일까.

'좋고 즐거운 것만 보기로 했다'는 홍상수 감독의 마음과 노력을 이해하지만,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제 내가 그의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정도 좋고 즐거운 것들은 이미 내 인생에도 차고 넘쳐. 굳이 영화까지 찾아 볼 필요도 없지. 이순신 장군은 반 밖에 몰랐다 - 아니면 나머지 반을 애써 회피했다. 어둠과 슬픔 안에 도사린 그것은 '가장 나쁜 것'이 아니라 '가장 위험하고 무섭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삶의 나머지 반쪽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견되어지고 성찰되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것이 빠진 '좋고 즐거운 것'들은 김빠진 맥주를 앞에 놓고 서로 불편한 구석을 감춘 채 '참 좋았지'를 연발하며 건배하는 것처럼 김빠진다. 나른하게 기분좋고 반짝거리는 유쾌한 것들 사이에 찝찝하고 무섭고 슬프고 안타까운, 검고 어두운 것들이 있어서 삶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완성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독 자신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알지만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 사실 아무도 똑바로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것들. 그러니까,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거기엔 동의한다.
죽으면 그 아름다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