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회복 일기

잡글.blarrr 2009. 4. 5. 23:15

먼 길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주변을 정리한다.
고치고 버리고 닦고 추스리고 백업하고 새로 장만하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것들을 시간을 갖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몇달간 일하면서 몸이 많이 상했다. 커피를 2-3배씩 마셨고 담배를 약간씩 피웠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가끔 과자나 콜라같은 것들을 먹었고 운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청소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건 쉬고 약 먹으니 대충 가라앉았는데 심해진 아토피는 쉽게 낫지가 않는다.

일단은 청소.

청소기를 자주 돌리고, 물걸레질도 하고, 욕실 청소도 하고, 가습기와 공기청정기를 분해해서 닦고 말렸다. 나는 청소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네다섯살 때, 할머니가 아파서 누워있거나 밖에 나갔다 오면 혼자 청소를 한답시고 물이 질질 흐르는 걸레를 손에 들고 방바닥을 닦거나 부엌에서 솥뚜껑을 닦고 있었다고. 할머닌 내가 얼마나 착한 손녀딸인지(-_-)를 얘기할 때마다 이 얘기를 가끔 한다. 내가 하는 청소란 게 아직도 그 수준을 벗어나진 못해서, 대단한 도구나 방법 같은 건 없고 그냥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닦고 빨래비누로 걸레를 빠는 게 전부다. 욕실도 수세미에 빨래비누를 묻혀 문지르고 타일 틈새를 솔로 문지른 후 물 뿌리는 것 정도. 하지만 꽤 열심히 한다. '증가된 엔트로피를 낮추는 기분으로'라고 해야 하나. 청소부가 되는 꿈도 있긴 한데 그 꿈이란 게, 춥지도 덥지도 않고 공기도 좋고 차도 별로 없는 길에서 빗자루로 낙엽이나 쓱쓱 쓸고 있는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듯 해서 스스로도 민망해하고 있다.

그리고 쇼핑

그동안 써오던 (아마도 폴리프로필렌으로 된) 얇은 도마 대신 옥수수로 만든 도마를 사고, 이십년 가까이 써온 싸구려 플라스틱 속옷장을 대신할 나무 서랍장을 주문했다. 사실 아토피는 고양이 알러지 때문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대신 주변의 다른 유해 물질을 줄이자는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이 입모아 '바보같아'라고 하는 이런 선택들. 하하

살면서 가능하면 적게 소비하려고 노력한다. 가구들은 거의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던 것들인데, 요즘은 빌트인 형식의 오피스텔만 전전해서 그나마 몇개 되지 않는다. 긴 책장 하나와 칼라박스 하나, 책상, 소파 하나, 그리고 이젠 나무 서랍장으로 대체될, 작은 플라스틱 서랍장. 생각해보니 정말 얼마 안되는구나. 게다가 모두 싸구려다. 그 작은 나무 서랍장이 들어온다면 우리집에서 제일 비싼 가구가 되겠지.

옷이나 구두는 한번 사면 사람들이 (낡아 해졌다거나 이젠 나이에 걸맞지 않는다거나 해서) '그거 좀 그만 입지'라고 할 때까지 입는다. 7년 정도 입어온 리복의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가 이런 식으로 못입게 되어서 이번에 비슷한 검정색 바지를 두개 샀다. 말이 트레이닝 바지지 내게는 평상시의 출근 복장이면서 외출복, 여행 수트, 등산복인, 말하자면 '바깥에 나갈 때 걸치는 또 하나의 피부'인 셈이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나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에서는 다른(불편한) 바지와 구두를 입어주지만 속으론 '드레스코드 따위, 옷 파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지'라고 생각한다. 의류 쓰레기의 처리도 굉장한 문제거리라고 들었다.

컴퓨터나 관련 기기들은 그나마 순환주기가 짧았는데, 그건 이전에 디자이너로 일할 때 고성능 컴퓨터가 필요했으니까 그랬던 거고. 이젠 대개 오피스만 쓰니까 그렇게 막 갈아치울 필요가 별로 없다. 카메라만 해도 2000년에 친구에게서 중고로 산 쿨픽스 5000을 아직도 별 문제 없이 쓰고 있다.

아, 그리고 지난번에 깨먹은 그릇이랑, 몇년간 별러왔던 칼도 샀다. 칼이 어찌나 비싼지, 금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휴... 평생 쓸 거라고 생각하고 샀다. 대대손손 물려줘야 할 것 같은 포스를 풍기는 칼인데 자손이 없으니. 나 죽으면 가져다 쓰라고 동생에게 말해뒀다. 이전에 쓰던 칼들은 버렸는데 세번째 남자친구와 같이 샀던 칼은 못버리겠길래 다시 그자리에 꽂아놨다. '칼에 용이 그려져있어'라면서 웃던 얼굴 생각이 나서. 사실 이런 기억들을 없애려고 새 칼을 산 건데. 훗.

무엇보다도 그리웠던 건,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되는, 혼자있는 긴 시간.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맛있는 것을 보고 만들고 맛보고 계획하며 혼자 미소짓는 시간들.
방바닥에서 오후 햇살이 조금씩 움직여가는 것을 구경하다가,
느긋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요리를 하고,
방울이 키키 털 빗어주고, 놀려주고(털을 빗다가 거꾸로 빗어주면 -_-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뒹구르며 발광을 한다 ㅋㅋ), 목욕시키고,
미처 못봤던 책들을 방 여기저기 놓아두고 조금씩 읽다가,
글이나 그림을 끄적거리다,
회색의 옅은 안개 속에 둥글고 붉은 해가 내려앉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
그러다 스르륵 잠이 든다.

정해진 것도 해야할 일도 없는 진공의 상태.
히끼꼬모리처럼 조용히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이것저것 마음 가는 대로 하다보면 온갖 생각과 기억들이 뭉실뭉실 올라왔다 사라진다. 따뜻한 물 속에 머리끝까지 잠긴 것처럼, 죽은 듯이 편안하지만 영원히 갈 수는 없는, 그런 행복.

수년 전에 사놓고 안본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을 오늘에야 찬찬히 들여다봤다. 사진이고 글이고 딱히 '최고야'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발견한 이 사진은 정말, 정말 멋졌다(너무 멋져서, 팔려고 내놓았던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사진은 에두아르 부바.

'잡글.blarr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2009.07.18
2009년 6월 16일 - 7월 15일  (0) 2009.07.16
2009년 4월 16일 - 2009년 5월 15일  (4) 2009.05.20
2009년 3월 16일 - 2009년 4월 15일  (0) 2009.04.16
회복 일기  (2) 2009.04.05
고치다  (8) 2009.03.28
2009년 2월 16일 - 2009년 3월 15일  (2) 2009.03.16
  (4) 2009.02.28
2009년 1월 16일 - 2009년 2월 15일  (6) 2009.02.22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인도코끼리 2009.04.09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나님처럼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지금보다 조금 좋은 세상이 될 것같네요. 리복이 품질이 좋군요. 7년이나 입다니..

    • Favicon of http://noyuna.tistory.com BlogIcon yuna 2009.04.09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맘에 꼭 드는 아주 편한 바지여서 맨날맨날 이것만 입었는데도 7년이나 입었어요(가끔 입는 옷들 중엔 10년 넘은 것도 있음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