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고치다

잡글.blarrr 2009. 3. 28. 23:53

프로젝트 계약 종료를 일주일 남겨두고 지난 주에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었다(사실 근무일수를 한달로 맞추기 위해 중간에 쉬기로 한 것이니 휴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전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쪽에 투입되어 거의 반년동안 휴가없이 출퇴근을 했다.
좀 지쳤다.
때맞춰 랩탑도 망가졌고.

3년 전 중고로 구매한 이 랩탑은 출장과 파견, 여행, 카페, 욕조 안까지 내가 가는 거의 모든 곳에 함께 했고, 거의 모든 부분이 고장났고, 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다. 나는 물건이나 장소에 정이 드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데도 다른 랩탑을 사지 않고 중고 구매 가격 만큼 돈을 들여가며 이걸 계속 수리해서 써온 것은, 그 모든 곳에 들고다니며 수족처럼 부리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를 버려서 쓰레기를 만드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거기엔 지인이 준 이 책도 한 몫 했다).

AS센터에서 이번엔 메인 보드 전체를 갈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면 새걸 사는 게 나을 정도라고 해서 거의 포기했다가, 뜻밖에 싼 가격에 수리를 해준다는 수리 센터가 마침 집 근처에 있다길래 휴가를 맞아 찾아갔다.

집을 나와 지하철역 한 정거장 정도를 걸었다. 3월 중순 치곤 이상스럽게 따뜻한 데다가 흐리고 축축한, 바람이 약간 불었지만 걷기 좋은 날씨. 일도 끝나가고. 평일날 쉰다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수리 센터는 예전에 갔었던 쌀국수집에서 20미터쯤 떨어진 낡은 오피스텔 8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번이고 반복된 왁스칠로 구석이 노랗게 변색된 복도를 지나 맨 끝, 문이 열려있는 방이다. 복도는 밝지 않았지만 해가 나는 날에는 그다지 어둡지도 않을 것이다. 문 옆에는 박스가 높이 쌓여 있었다.

내 방만한 사무실에 두 남자가 있었는데, 중앙의 작은 손님용 탁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내게 자리를 비켜주고 밖으로 나갔다. 한켠에 작업용으로 보이는 책상과 스탠드가 있고 주인으로 보이는 또다른 남자가 앉아있다가 나를 맞았다. 한쪽 벽에는 천장까지 닿는 철제 랙에 'LCD 케이블' 등이 적힌 종이 상자들이 나란히 놓여있고, 다른 한쪽 벽에는 역시 철제 랙 안에 랩탑들이 책처럼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오래된, 망가진 랩탑이라니. 한때 많은 사람 앞에서 위용을 뽐내며 중요한 뭔가를 보여주었을, 혹은 요리법을 찾거나 개 사진을 저장하는 것 외에 별다른 중요한 일은 하지 않았어도(어쩌면 주인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애지중지하는 손길을 받았을 기계들이, 변두리 오피스텔 꼭대기에 적적하게 쌓여있다. 그 중에 내 랩탑을 살려줄 기계도 있을 것이고, 그 기계에도 그만의 작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이거 오래 하셨나봐요?"
"십년 넘었어요."

십년.
꼭 이 자리에서 십년이라는 말은 아니었을텐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십년 전의 이 방안과 이 건물, 주인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출입문 옆에 화장실 입구가 있고 그 옆엔 냉장고, 냉장고 위에는 (이 방안에서 제일 새것으로 보이는) 냉온수기가 놓여있었다. 빈 곳이 없이 꽉 차 있지만 비좁은 느낌은 들지 않았고, 장식 하나 없이 기능적으로 정리된 방인데도 왠지 아늑해 보였다.

누군가 고장난 기계를 들고 찾아온다.
모델명을 비교한다.
맞으면 이쪽의 멀쩡한 것을 빼서 저쪽의 멀쩡한 것에 끼우고.
고치거나 못고치거나. 기뻐하거나 포기하거나.
딱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어떤 명확함이 있는 일. 명확하고도 실질적인 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나처럼 누가 쓸지도 모르고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줄지도 모르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것을 누가 알아들을지도 모를 말들로 규정하고 포장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삶보다 어쩌면, 명확할까.

그날그날의 작지만 명확한 성공과 실패. 그리고 끝.

그날 나는 그 수리센터 주인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의 십년 앞에서 나도 모르게 나의 십년을 떠올렸을 거고, 오래된 것들이 가득한 방 안에 틀어박혀, 명확한 필요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손에 잡히는 뭔가를, 아귀를 딱 맞춰 쥐어주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ps. 랩탑은 고쳤다. '손볼 수 있는 건 다 봐서' 30만원에.
cpu를 포함해 메인보드를 교체하는 김에 아예 하단부를 다른 랩탑으로 교체했다. 비슷한 모델이지만 cpu는 좀더 클럭 수가 높은 것이었고, 더불어 찌걱거리던 힌지, 오른쪽 아래 깨진 부분도 해결되고 하드도 100기가로 바뀌었다. 우스운 건, 그렇게 다른 랩탑과 반쯤 합체가 되어 돌아온 기계를 받아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말끔히 닦여있는 LCD였다는 거다. 지난 3년 동안 휴지로 두번쯤 닦았나. 나는 LCD가 그렇게 깨끗하게 닦여질 수 있다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티 하나 없이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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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시바 2009.03.31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그 수리센터 주인의 10년 역사를 봐준 유나씨가 더 아늑해보이는군요. 부러워요~

  2. yame 2009.03.31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옷~ 이 글 감동적인데요? 그리고 내 눈으로 그 장면들을 보는 듯한....

  3. Favicon of https://dbjang.tistory.com BlogIcon dbjang 2009.03.31 2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곳이 있군요? 그럼 내것두 사망하기 전에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넷북으로 바꿨는데 해상도부터 1024 600 이거든요 -_- 오히려 예전의 후지쯔가 더 살갑게 느껴지는거 있죠? ^^

    • Favicon of http://noyuna.tistory.com BlogIcon yuna 2009.04.01 2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엘지꺼 샀군요? 예전꺼는 버렸어요?
      나 첫 랩탑이 1024 600이었는데 세로 해상도 때문에 좀 고생했던 기억이;;

  4. Favicon of https://dbjang.tistory.com BlogIcon dbjang 2009.05.13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 다시 찾느라ㅋㅋㅋ 계속 P7010으루 찾았거든요 ^^
    여기 약도 있어요??
    아무래도 P7010을 다시 가져와야 할거 같아요.
    이번 넷북이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하고 tv 랑 연결도 안되고 -_-
    여기 위치좀 알려주세염~~ ^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