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2022-03-16 07:11 #중년일기

2022-03-16 10:55

2022-03-16 19:36 어제밤도 왼쪽 아랫배의 불편감과 빈뇨, 불안으로 한시반에 잠이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끝이 없는 검고 공허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밤이었다. 다 포기하고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가, 기운을 내서 살아남아 내 고양이들 끝까지 보살펴야지 했다가, 불편한 몸의 느낌에 다시 절망으로 떨어졌다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냐며 희망을 생각했다가를 반복했다. 마음 뿐만 아니라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열이 나고 굳고 아팠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고양이들 약과 주사와 밥을 챙겨주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새벽의 봄 공기는 어찌나 달콤한지, 하늘과 나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뿐만 아니라 병원 어느 구석에, 아니 이 지구 어느 구석에 살아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그런 것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세상 밖에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게 슬로우비디오처럼 하나하나 명료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새벽의 병원 채혈실에는 출근 버스 줄보다도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줄인 줄 모르고 중간에 섰더니 내 나이 쯤 되어 보이는 눈이 퀭한 여자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자기가 여기 아까부터 줄을 서있었다고 알려주었다. 그 여자의 뒤로 너덧명이 더 서있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맨 뒤에 섰다. 내 뒤에 와서 선 노인은 부인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우물쭈물 영수증을 확인하고 줄을 서고 바코드를 찍었다. 채혈을 마치고 초음파까지 시간이 남아 지하 식당에서 죽을 먹었다. 하얀 불빛 아래 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어두운 장막 같은 것이 쳐져 있어서, 나는 저렇게 좋은 세상과,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사람들의 세상과 단절돼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키키가 죽었을 때처럼 커다란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망상.

초음파를 마치고 의사 진료까지 두시간을 기다렸다. 산부인과 옆 6층 천정까지 뚫린 휴게 공간에는 사람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것이 보이고 바닥에는 검은 조약돌이 깔린 찰랑거리는 얕은 연못이 있다. 긴 벤치가 드문드문 있고, 나처럼 어제 제대로 못잤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누워있거나 앉아있었다. 옆 소아재활치료실에서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졸음과 절망으로 멍하던 순간 문득, 저 사람들 모두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이들의 고통, 바램, 안심, 행복 같은 것들이 갑자기 내 안으로 밀려들어왔고, 뭐라 말하기 힘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커다란 연민이 올라왔다.
사무량심을 한구절 외우고, 다시 나를 위한 사무량심을 한구절 외우고, 그렇게 한구절 한구절을 외워갔다.

‘모든 존재들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들이 애착과 증오와 편견 없는 평정심에 머무르기를.
내가 애착과 증오와 편견 없는 평정심에 머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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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양 표지자 검사(CA 125)결과와 초음파 결과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이 모든 증상들을 이야기해도, 기본적으로 의사의 소견은 작년 10월과 같았다. 어쨌든 빨리 난소제거술을 받으라는 의견도. 난소제거술을 하고 나서 조직검사를 하고, 거기서 암세포가 발견되면 항암 치료를 하거나 다시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고 내가 너무 불안해하니 일단 CT를 찍어보자고.

이 의사 선생님은 항상 숫자로 이야기하신다. “brca1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00%가 50대 이후 난소암이 확인되었고…” 이런 식. 진료실 문을 나오면서 ‘이 선생님은 자기나 가까운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본 적이 없나 보다. 확률이 0.01%라도 그 일이 내게 일어났을 때 내겐 그게 100%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혹시 수술 중에 암이 발견되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에는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서 지금 집에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실 확률 보다도 낮은데 그걸 지금 굳이 얘기를 해야 할까요?”라고 하셨다. 숫자가 아니라 직접 예를 들어 설명해주니 좀더 와닿기는 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의사 선생님을 보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수술 일정은 진료실을 나와 상담 전문 간호사가 잡아주었다. 빨리 수술을 받으라면서도 잡을 수 있는 수술 일정은 빨라야 8월 말이었다. 암이 아니기 때문에 늦어진다고 했다. 씨티 결과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일정이 조금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그렇게 입원과 수술에 대한 긴 설명을 듣고, 입원 예약을 하고, 그동안의 진료와 검사 기록을 복사해서 집에 왔다.

수술까지 6개월을 기다릴 수 있을까, 기다려도 괜찮을까, 회사는 어떻게 하나, 아니 다 제쳐두고 그렇다면 이 통증과 불편감은 뭔가, 혹시 몰라서 3월 말과 5월에 삼성서울병원과 서울대병원도 예약해놨는데 거기도 가봐야 하나 또 여러가지 고민이 되는데 일단 오늘은 그만 생각하고 잠을 좀 자고 싶다. 2주 동안 몸무게가 2kg 빠졌다. 잘 못먹긴 했지만 5일 단식을 했을 때도 이렇게 빠지진 않았는데 쓸데없는 걱정에 뇌를 엄청나게 썼나보다. 나라는 인간 한심한데 어쩔 수가 없네.
#병원대기시간이너무길어서 #지나치게길어진 #중년일기 #brc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