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산책

산보.picnic 2007. 5. 20. 17:31

비릿한 냄새가 나는 강가를 산책했다. 얼마전 내린 비가 고여서 웅덩이들을 이루었고, 미끌미끌한 진흙길을 간간이 자동차들이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가는 것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그곳엔 애기똥풀과 쑥이 지천에 깔려있고,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에 가득 달린 아카시아꽃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초등학교때 따먹었던 아카시아꽃의 씁쓰름하고도 비린 맛이 생각났다. 냄새는 사진이나 음악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훨씬 강렬하게,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지고 군데군데 하얀 칠이 벗겨진 굴같은 통로를 지나, 버려진 둥근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 안의 먹먹한 공기는 마치 꿈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깥쪽 뜰에는 오래된 전나무들이 서있고, 가지 끝에서는 큰 붓처럼 생긴 연녹색의 새 잎들이 나와있어서, 조심스럽게 그것들에게 악수를 청한 후 까끌까끌한 잎들을 쓰다듬었다. 산 너머에서 저녁 햇빛이 비쳐들어 잔디 끝이 노랗게 물들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떠나고 싶지 않아서, 모두 다 기억해두고 싶어서,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느리게 걸었다.

마을에는 짙은 개나리색 벽을 한 절이 한채 있었고, 컴컴하고 큰 샘터가 있었고, 밭 옆에서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눈치를 보며 털을 다듬었다. 쉭, 쉬익 하고 소리내니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저녁을 먹는 사이 소나기가 내렸다. 길가에서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고, 삽시간에 조금전의 잔잔한 공기들이 소란스럽게 요동한다. 기지개를 켠다. 방에 들어오니 아까 씻어놓은 오렌지와 참외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기고, 푸른 벽지에 어둑어둑 어둠이 배어든다. 잠이, 뿌연 잠이 밀려온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창밖에서 오래된 나무 뿌리 냄새 같은 찬 공기가 흘러들어오고, 푸른 벽지에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쇙쇙 났다.

행복한 기억.
이다음에 늙어서 다시 꺼내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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