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lifelog


햇살이 좋은 초겨울 아침 나절. 목도리와 코트를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김장을 하는 아주머니들을 구경하고 닭갈비 집과 모텔 골목을 지나면, 내가 책을 부치러 자주 가는 작은 우체국이 있다. 오늘은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께 내게 있는 두권의 번역서 중 하나를 부치러 갔다.

언제나 한산한 우체국 안. 백원짜리 누런 봉투를 사고 책 안에 쓴 메모를 다시 읽어보고 입구를 붙이고 우편번호 책에서 꼼꼼히 우편번호를 확인하고 검정색 굵은 매직으로 주소를 쓰고. 그리고 다시 두 손바닥에 탁 놓아본다. 마치 내가 책 선물을 받은 것처럼 상상하면서. 받고서 기뻤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언제나 친절한 우체국 언니들. 오늘은 책을 부친 후 종이 잔에 커피까지 얻어가지고 우체국을 나섰다. (이 동네를 막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 동네엔 가끔 정겹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커피를 들고 눈이 쌓인 보도를 조심조심 걸어다니면서 '겨울이구나'라고 입 속으로 말해본다.
'겨울이구나.'

빌딩 꼭대기에서, 붕어빵에서, 그리고 외투 깃을 세운 사람들의 입에서 하얀 김이 나고, 바람 속에선 웬지 죽은 잎사귀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나는 겨울. 목이 움츠러들면서도 웬지 아련한 기대나 기억 같은 것이 피어오르지. 집 앞 조그만 만두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한판을 사들고, 커피를 다 마신 종이잔에 오뎅국물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조용하고 소박한 삶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읽고, 보고, 듣고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들
좋은 사람들과의, 서두를 것도 과장할 것도 없는 대화들
이런 것들을 놓친 채 살았다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너무 지치도록 일을 했고, 너무 바빴다. 지금의 이 보석같은 시간, 이 행복한 느낌들. 앞으로 펼쳐질 나날들을 위한 좋은 자양분으로 꼭꼭 쌓아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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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창호 2007.11.21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小想이네요...

  2. Favicon of https://dbjang.tistory.com BlogIcon dbjang 2007.11.23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그리루 이사가구 싶어요~
    집세가 어느정도만 된다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