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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자주 슬펐다. 슬픔을 조절하는 호르몬이 있다면 그것에 뭔가 이상이 생겼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요즘 자주 일생을 돌아본다. 돌아보면 항상 슬펐던 것만 같다. 슬플 때만 돌아보니까 슬픈 기억만 남아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내 인생에서 그다지 슬프거나 어려웠던 일은 없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간절히 갖고싶거나 하고싶은 게 별로 없었고, 있어도 금방 포기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20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시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혼자였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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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슬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들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다. 젋은 시절의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여섯살 때 시골 학교로 발령이 나서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시골집에 방을 얻어 떠났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엄마가 일하는 시골 마을로 놀러갔었던 기억이 난다. 천정이 낮고 어둑했던 엄마 방. 아침에 깨어보니 엄마는 출근하고 없고 작은 창문으로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방 안에 나 혼자 있었다. 아랫목 따뜻한 곳엔 엄마가 떠놓은 밥과 반찬 몇개가 차려진 밥상이 있었고 '일어나면 엄마 없다고 울지 말고 밥 먹어'라고 쓰여진 메모가 있었다(나 아직도 그 쪽지에 써있던 구절이며 엄마 글씨까지 다 기억한다). 그걸 보는 순간 뭔가가 한꺼번에 몰려오기라도 하듯 울음이 터져나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셋방에서 자던 꼬마애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으니 주인집 할아버지가 놀라서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문을 잠근 채로 열어주지 않고 더 크게 울었다. 그때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몰랐다. 할아버지는 놀라서 엄마가 일하는 학교로 전화를 했고,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애를 좀 데려가서 달래주라고 했던 것 같다(그때 젊은 커리어우먼이었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다).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따라가서 그집 꼬마 아이랑 같은 방에 넣어졌다(말 그대로 애들 둘만 방에 넣어놓고 어디로 갔다 -_-;).

또 다른 낯선 방에서 울음을 그치고 이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있었던 그 때. 그때 내 마음 속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진난만하고 행복하게 혼자 놀고 있는 그 어린 아이와 나 사이에 아주 깊은 간극이 있었다. 그 애는 모르는 어떤 것을 내가 알고 있고, 그 애에게 그걸 이해시키려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 아마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것이다.

그 애는 모르는 어떤 것. 그때 내 머리 속에서 간단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삶에 '슬픔'이라는 것이 있고 어쩌면 그것을 기꺼이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보고싶어서 운 것도, 무서워서 운 것도 아니었고, '울지 말고...'라는 글귀가 슬퍼서 울었다. 그리고 슬피 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서, 그래서 울음을 그치기 싫었던 것이다.

할머니한테 야단맞고 나서, 혹은 할머니를 아무리 졸라도 군것질거리를 안사줄 때 텅 빈 엄마아빠 방에 가서 혼자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기억도 난다. 엄마라고 군것질거리를 잘 사줬던 것도 아니고 할머니보다 엄마랑 더 살뜰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제일 큰 이유라면... 그냥 구슬픈 노래가 좋아서, 슬픈 게 좋아서였다. 어린 시절의 슬픔의 기억 그 중심에 엄마가 있는 이유는, 그 외에(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 외에) 나같은 꼬마에게 도무지 슬플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엄마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후후후 -_-;).

나이가 들면서 그 '간극'의 느낌은 또래 아이들에게서 대부분의 인간에게로 확대되었다. 사춘기를 보내고 20대가 다 지나도록 나는 대부분의 주변 사람과 공감하지 못했다. 별로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래의 친구들과 즐겁고 유쾌하게 보낸 시간들이 분명 있었지만 나는 내내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쓸데없는 것에 탐욕을 부리는 멍청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_-), 그 어린 시절부터 혼자라는, 슬픔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혼자라는 것, 슬프다는 것을 금기시하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도 20대에는 연애의 재미가, 좀 지나서는 일에 대한 욕심이, 그런 간극이나 슬픔 따위를 덮어 잊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과 섞였고, 때로는 (주로 술김에) 부질없는 이들에게 간극에 대해 토로했고, 때론 간극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반가워했다. 좋은 시간들이었다. 나같은 사람들의 인생에도 그렇게 사람들과 섞여들 수 있는 기간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그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 또한 다행스럽다. 전자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좋은 인연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후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사람들 틈에서 지치고 고갈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다시 나로, 혼자로 돌아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슬프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숨을 쉬거나 소화를 시키는 것처럼 구태여 의식을 하지 않고 움직여도 되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다 보면, 그 달콤한 슬픔이 오히려 더 유쾌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가라앉아 글이나 그림이 되기도 하고, 그냥 지나가기도 했다. 그것 역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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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슬픔 얘기로 돌아가 보자면...

이건 달랐다. 달콤함이라곤 전혀 없는 슬픔. 지금까지처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렇다고 내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도 없는 어떤 상황 앞에서 나는 무력했고, 지쳐갔다. 가슴이 옥죄이고 온 몸의 피가 눈물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울음을 며칠이고 계속 울었다.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눈물이 꾹꾹 차서 뭘 먹을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데 그 와중에 자꾸만 자꾸만 청소를 해서 집은 반짝반짝해지고. 그리고 또 울고.

이것은 한마디로 내가 갈고닦아온 '슬픔을 곁에 두고 기꺼이 즐기기' 따위의 기술이 통하지 않는, 확고 부동한 무게로 내 인생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그런 슬픔이었다. 나중엔 상황이 슬퍼서 슬픔을 조절하는 호르몬이 망가진 건지, 그게 망가져서 슬픈 건지,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죽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때, 인생의 모든 것들이 착착,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한참동안이나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몸이 나으려면 시간이 걸리듯이 마음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행복하고 원기왕성하다.
내 힘이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지만 상관없다. 내가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도움을 청해도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지금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도 행복하고 고맙다. 

그리고 내내 달콤한 줄만 알았던, 쉽게 생각해왔던 내 인생의 오랜 친구 '슬픔'에 너무 심하게 데여서, 당분간은 제아무리 달콤한 슬픔의 미끼라도 덥썩 물 자신이 없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좀 행복하려고 한다.


뭐;; 좀 그립긴 하네.
그리고 또...



요즘 청소를 안해서 집이 너무너무너무 더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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